<편집자 주>
김선생의 광주사랑(470) 광주를 포근하게 품어주는 산, 무등산은 왜 무등산이라고 부를까요?
육당 최남선의 시조를 한 편 소개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무등산을 노래하는 시를 남겼지만 나는 이 시조가 가장 좋다.
무등산 / 육당 최남선
얼어서 왔삽다가 다수하여 가나이다.
뜻아니한 곳에 와서 젖꼭지를 물었나이다.
어머니 한 어머니이심을 인제 알고 갑니다.
얼었던 마음이 따뜻해져서 돌아간다는 말이 좋다. 어머니라는 말과 젖꼭지라는 표현은 더욱 좋다. 사실 지리산 산신과 무등산 산신은 여자라고 알려져 있다. 시조의 내용을 보면 육당 선생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던 듯하다. 몰랐다고 해도 상관없다. 누구든 무등산 자락에 들어가는 사람이면 자신을 감싸는 포근하고 넓다란 여인의 가슴을 느끼게 된다.
광주에 한 시인이 있었는데, 무등산에서 임종을 맞이하는 것이 마지막 소원이었다. 무등산을 무려 천번을 올라간 시인이었으니 그런 소원을 가졌을 만도 하다. 가족들의 반대로 시인의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시인을 생각하면 안 됐지만, 나는 시인이 소원을 이루지 못한 일을 다행이라 생각한다. 그 시인 한 사람의 소원이 전설이 되어 무등산을 덮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무등산은 자신을 찾는 자녀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변치않는 어머니이고 고운 추억으로 남아야만 한다.
하나 덧붙이면, 광주의 옛 이름인 무진주(武珍州)도 무등산 이름에서 나왔다. 물돌->무돌에서 무와 같은 음을 가진 호반 무(武)를 가져오고 돌(石) 대신에 보다 멋진 뜻을 가진 한자, 보배 진(珍)자를 가져온 것이다. 백제 시대에는 진(珍)을 돌이라고 읽었다는 기록도 있다.
(‘珍’자는 ‘보배 진’이지만, ‘珍’의 훈인 ‘보배’는 아름다운 돌을 갈고 닦아 만든 것이기 때문에 예로부터 ‘珍’의 훈을 ‘돌’이라 읽었다.-조강봉)
서(立)있는 돌(石)도 나중에 상서(祥瑞)로운 돌(石), 서석(瑞石)이 되었다. 참고로 무등산에는 입석대(立石臺)도 있고 서석대(瑞石臺)도 있다. 서석(瑞石)은 나중에 무진(武珍)과 함께 광주의 이름이 되는 영광을 차지하였다. 이 자랑스런 이름들은 서석동이나 서석고등학교, 무진중학교나 무진대로 등 여러 곳에 남아있다. 무등산에서 나온 무등도 무등양말, 무등일보, 무등도서관, 무등중학교, 무등경기장(기아 챔피언스 필드) 등 많은 사랑을 받고있다.
무등산 서석대와 천왕봉. 무등산은 정상 부분에 무리를 이루고 우뚝 서 있는 돌이 장관을 이룬다. 무돌산이라는 이름도 많은 돌에서 나왔다.
1872년 광주 지도속의 무등산. 정상 부근의 돌무더기를 뚜렷하게 그렸다. 당시에 사람들이 무등산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짐작케 한다.
▲ 김희식 시인, 2021년 12월 23일자 충북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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