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돌씨의 기록Ⅰ “나의 5월과 당신의 5월이 다른 듯 닮았다” 이소영 기자 | 광주평생교육진흥원 제6기 웹진기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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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하지 않겠지만 미리 밝혀 두겠다. 필자에 대한 TMI(Too Much Information). (어쩌다) 광주에 산 지 3년 차 외지인. ‘토박이’가 아니라는 말이다. 적어도 천일(千日) 동안 광주 곳곳을 빨빨거리며 돌아다녔다. 프리랜서 기자, 작가라는 업을 수행하며 취재도 적잖게 했다. 쉽지만은 않았다. 광주라는 지역을 이해하고 알아가는 데 에너지가 소요됐다. 당연한 일이었다. 허나 이제 조금은 알 듯하다. 상처. 이건 상처를 바라본 나의 3년, 그 기록이다.

5·18이 뭐냐고 묻는다면…주먹밥을 드리겠소

영화 ‘택시운전사’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주먹밥 취재 건이 들어왔다. ‘주먹밥이 뭐라고?’
주먹처럼 둥글게 뭉친 밥덩이, 맨손으로 집어먹는 밥. 어학사전에 소개된 뜻이다. 기원은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오래전부터 함께 해왔다. 전쟁터에서 밥을 지어먹을 여건이 되지 않을 때, 마땅히 찬거리가 없을 때, 갑자기 나들이를 가야 할 때…. 주먹밥은 찬밥에 갖은 재료를 다져 넣고 조물조물 뭉쳐 탄생하는 고마운 음식이었다.

그동안 광주는 천천히 나아가더라도 ‘기억(5·18)’을 잊지 않기 위해 굳은살 박인 손을 내밀었다. 예를 들면 영화, 그림, 공연, 책으로 재탄생…. ‘주먹밥’도 그중 하나다.

“가는 곳마다 시민들은 박수를 쳐주며 환호했고 음료수, 박카스, 주먹밥 등을 올려주었다. (시위대 차량에 탔던) 나는 살 맛 나는 기분이 들었다.” 5·18민주화운동 교과서에 실린 1980년 대학생 강주원씨의 증언이다.

전후 맥락은 이렇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이 도로를 통제하며 광주를 고립시키자, 생필품이 부족해졌다. 무엇보다 쌀이 없었다. 금남로 주변 재래시장 상인을 비롯, 부녀회는 집안에 있던 쌀을 가져와 길가에 솥을 내걸고 밥을 지었다. 소금으로 간만 맞춘 주먹밥일지라도 그 안에는 ‘나눔’과 ‘연대’의 정신이 담겨있었다. 영화 ‘택시 운전사’에서도 이 주먹밥이 나온다.

배우 송강호는 촬영 중 가장 슬펐던 장면으로 음식점에서 주먹밥 먹던 장면을 꼽기도 했다. 그렇다. 주먹밥은 광주에 실제 등장했던 ‘역사의 단면’이다. 우리는 지금 광주에서 재구성한 주먹밥을 맛 볼 수 있다.

말하지 않아도 들리는 소리

“어머니는 가장 편한 순간일 때조차 광주항쟁의 기억에 대해 언급하길 꺼리신다. 물어봐도 대답이 없다. 일종의 채무감이 아닐까 생각한다. 80년 5월, 어머니는 젖먹이인 나를 부둥켜안고 있었고, 밖에서는 사람이 죽어 나갔다.” <허지웅, 버티는 삶에 관하여, 문학동네, 2014>

2년여에 걸쳐 취재했던 주먹밥 맛집은 6군데. (광주시가 선정한 ‘광주주먹밥’ 시범업소는 9곳 정도.) 연령층이 대부분 20-30대, 젊은 사장님.

한 마디로 5·18을 ‘학습’으로 익힌 세대다. 취재를 하며 하나의 공통점을 발견했다. ‘주먹밥을 먹는 어르신들의 반응’이었다.

인터뷰어인 나는 그럴듯한 스토리를 기대했는데, 대부분 가게의 대답은 이랬다. “아무도 5·18민주화운동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아요.” 광주살이 1년차에는 몰랐다. 살아보고, 지내보며 알 듯했다. 가게에서 조용히 주먹밥을 먹고 간 이들의 마음이 아주 희미하게 보였다. 구구절절 말하지 않아도, 아는 것, 들리는 것, 보이는 것.

“한 번은 식사 후 주먹밥만 종류별로 따로 인당 포장해 가셨던 50~60대 단체 손님들이 있었어요.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 마음을 알 수 있었다고 할까요. 주먹밥을 만들고 판매하면서 공감의 순간이 더 많아졌어요.” 스물일곱, 청년 셰프는 이렇게 말했다. 이 가게엔 스테이크·파스타·리조또·피자 등과 나란히 자리하고 있는 메뉴 ‘광주주먹밥’이 있다.

21년 11월의 어느 날, 송정역사 내 주먹밥 집에서

일이 있어 광주송정역에 가야 한다면, 역사 내 주먹밥 가게를 추천하고 싶다. 이 가게 안에는 광주주먹밥 역사에 관련한 웹툰을 담은 액자가 걸려있다.
“손을 꼭 잡고 자주 오시는 60대 중반 부부 단골손님이 있어요. 광주주먹밥의 역사를 알고 있는 것 같아요. 말은 안 하셨지만, 웹툰도 쳐다보셨고요.”
특별한 에피소드가 없어도 주먹밥 시범 사장님들은 이렇게 말했다. “이 주먹밥이 5·18을 잇는 ‘매개체’가 되는 순간들이 있었다고.” 본능처럼 알 수 있는 것이었다.

소설가 김훈의 산문집 『연필로 쓰기(2019)』에 이런 대목이 있다. ‘음식을 먹으면 그 재료는 똥이 되어 몸을 빠져나가지만, 맛은 사라지지 않고 마음의 지층 맨 밑바닥에 숨어 있다가 불현듯 떠오른다’고. 나는 그 즈음부터 주먹밥이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허례가 없고 숨김이 없고 부담이 없는 주먹밥. 아주 작은 주먹밥은, 내 마음 속 무언가를 불현듯 건드렸다. 자꾸만.

5·18민주묘지, 이제 가볼까?

이제서야. 광주 북구에 있는 국립5·18민주묘지에 가기로 했다. 갈 기회가 없었다고 해야 할까. 아니다. 그건 핑계다. 정정한다. 대면하기가 두려웠다. 높은 성벽으로 둘러싸인 것으로서의 ‘5·18’이 거인처럼 서 있을 것 같았다. 상처 입은 영혼들의 목소리가 다가올 것 같았다. ‘벽을 부수자.’ 행위모드(doing mode)대신 존재모드 (being mod)로 느껴보리라.

동행한 7살 아들. 아이는 아이의 시선대로 나는 나의 시선대로 5·18을 만나리라. 사소한 결심이 필요했다.

도착과 함께 눈에 띈 건 천막이었다. 알아차렸다. 그것이 주먹밥이라는 것을. 적십자봉사단에서 나온 것이었다. 고향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가웠다. 철퍼덕, 앉은 자리에서 주먹밥 두 덩어리 꿀꺽. 짜지도 달지도 않았다. 기본에 충실한 맛. 보이는 건 흰 밥과 깨, 김. 역시 ‘한국인은 밥심.’ 배를 채우니, 평온해졌다. 잡생각이 달아났다.

입구 앞에서 주먹밥을 나눠주고 있었다.

역사적인 순간들을 회고하는 사진전이 열리고 있었다. 어김없이 나온 주먹밥 나눔 현장과 흑백사진을 뚫고 나오는 핏빛 현장들의 모습들이 눈에 들어왔다. ‘때린다, 달려간다, 쫓아간다, 뒤엉킨다, 넘어진다, 고함을 지른다.’ 동사가 멈췄다. 시체는 사방에 흩어져 있었고, 차디찬 땅에 죽어 누워 있었다.

“군인들이 왜 싸우는 거야?”, 어떻게 말해줘야 할지 멈칫했다. 부당한 국가권력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아이가 납득할까. 이해할 수 있을까.
“서로 사이가 안 좋았던 때가 있었어.”, “이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아야지.”

사진을 둘러보는 아이

추모관으로 발걸음을 뗐다. 시체를 감싼 비닐과 피에 물든 태극기, 살상용 총탄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기억의 파편들이 세상 밖으로 꺼내져있었다. 상처는 아물어도 상흔은 두고두고 남는다는 진리. 이 아픔을 세상 밖으로 꺼내기까지 참 어려웠을 터.

“우리는 고통스러워할 줄도 알고 고통에 대해 이야기할 줄도 안다. 고통은 남루하고 힘겨운 우리네 삶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한다. 아픔, 그건 우리에게 하나의 예술이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문학동네)

우리는 걷고 또 걸었다. 묘지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 에워싸는 듯한 ‘임을 위한 행진곡’. 공간과 사람을 압도했다. 그렇게 역사의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갔다. 거대한 서사를 걷는 청취자가 됐다. 그건 예술이었다. 묘역에 묻혀있는 이들. 한 사람 한 사람마다 역사의 조각들을 가지고 있었다. 유명의 존재보다도 더 빛나는 무명의 존재들의 이름을 읽었다.

“어떤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것, 그가 사람을 죽이고 죽어간 이야기를 듣는 것은 상대의 눈을 바라보는 것과 같다……”(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문학동네)

추모탑

다녀온 후…5월은 현재진행형

나의 5월이 달라졌다. 행사 많은 달, 돈 많이 깨지는 달이 더는 아니다. 이것만은 확실하다. 광주를 둘러싼 5월의 공기. 나는 그 공기를 맡고 말았다. 그 공기는 ‘시간의 세례’를 받아 계속되고 있다. 1980년과 2022년은 그렇게 이어져 있다.

#에피소드. 5월에 만난 광주 사람들과 장소

1) 취재현장에서 만난 어느 센터장님. 왼쪽 가슴에 달려있는 5·18배지. “적어도 5월엔 달고 있어야죠. 5월엔.” 그의 말.
2) 단골 카페 한 귀퉁이에 적혀있는 5월의 시. 조태일, <다시 오월에>.
3) ‘광주 시청 5월호’ 5·18민주묘지 내 추모탑 사진을 찍은 오종찬 사진작가님의 말. “이거 찍으려고 문 다 닫힐 때까지 기다렸어요. 태극기와 노을을 함께 담으려고.”
마지막으로 식탁 위에 놓여있는 ‘광주 시청 홍보지 5월호’를 본 우리 아이의 오늘 아침 말.
“엄마!! 이거 5·18공원이잖아요(추모탑이 맞지만). 우리 갔잖아요. 기억나요.”

오.일.팔이라는 단어를 또박또박 말하던 아이의 업 된 톤.
‘그래 그거면 됐다. 언젠간 너도 더 잘 알게 되겠지.’
우리의 5월은 이미 달라져있었다.

에피소드 3번에 나오는 추모탑 사진

“어렸을 때는 고통이 삶의 요소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그 다음엔 ”고통은 삶의 필연“이라는 말에 수긍이 갔다. 그러다가 탈식민 페미니스트 글로리아 안살두아 책에서 고통은 ”삶의 방식(way of life)“이라는 구절을 발견하고 완전히 절망했다. 어떻게 그렇게 산단 말인가?” (편협하게 읽고 치열하게 쓴다, 정희진, 교양인)

“우리가 많은 것을 놓치고 보지 못했다는 사실도 부인하지 않겠어. 하지만 우리는 눈이 멀었으면서도 동시에 순수했어. 우리는 두 개의 세상, 두 개의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라는 것, 당신은 그걸 꼭 알아야해……”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문학동네)

5·18은 삶의 방식이다. 두 개의 인생을 사는 곳. 이곳 광주의 5월은 그렇다.

이소영
제6기 웹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