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여기 숨쉬는 이 시간은 나를 어데로 데려갈까
많은 기쁨과 한숨들이 뒤섞인 이곳에서
그대와 우린 모두 우 기쁜 미래를 향해
나 그대 우리 모두
내가 힘들던 그 모든 기억이 아직 남아 있는 가슴에
따뜻하게 피어나는 느낌이 있어
내가 바라는 그 모든 꿈들이 전부 이뤄질 수 없어도
가장 넓고 깊은 사랑 지금 내 안에 있어
나에 이 마음 영원히 갖고 싶어 모두 함께 나누며
여기 숨쉬는 이 시간은 나를 어데로 데려갈까
많은 기쁨과 한숨들이 뒤섞인 이곳에서
사랑만으로 늘 가득한 그런 내일로 가고 싶어
서로가 함께 영원히 행복하도록
나 그대 우리 모두
아 아파한 시간 만큼 기쁨을 만들어 가요
나에 그 모든 눈물들 만큼 사랑을 만들어요 big-up!
오~서로 아껴주는 마음을 기억하며 우리가 만들어 가요
여기 숨쉬는 이 시간은 나를 어데로 데려갈까
많은 기쁨과 한숨들이 뒤섞인 이곳에서
사랑만으로 늘 가득한 그런 내일로 가고 싶어
서로가 함께 영원히 행복하도록 나 그대 우리 모두
거친 파도의 바다처럼 때론 아픔도 왔었지만
슬픈 바다를 감싸주던 넌 하늘과 같았어
사랑만으로 늘 가득한 밝은 미래로 가고싶어
서로가 함께 영원히 행복하도록 나 그대 우리 모두
모두가 함께 여기서 만들어 가요
나 그대 우리 모두
룰라의 히트곡 가사를 옮기고 노래를 들어본다.
"여기 숨쉬는 이 시간은 나를 어데로 데려갈까"
몇 년 전에 내가 이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 가슴이 쿵쿵 뛰었던 기억이 새롭다.
"서로가 함께 영원히 행복하도록 나 그대 우리 모두
모두가 함께 여기서 만들어 가요"
지금 들어도 여전히 힘이 솟는다. 이 노래를 들려주고 싶은 분들이 있다. 그분들은 70세 80세라는 나이를 이겨내고, 광주평생교육진흥원에서 한글을 깨친 어르신들이다.
사실 이 노래는 어른들이 즐겨 부르는 노래는 아니다. '안동역에서'나 '아씨'같은 노래가 더 어울릴 것이다. 그런데 오늘은 어르신들에게 이 노래를 들려주고싶다. 아니 어르신들과 손잡고 함께 불러보고 싶다.
70년 80년 긴 세월을 한글도 모르고 살아온 어르신들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빛도 없는 길고 긴 터널 끝에서 맞이한 태양은 얼마나 눈부셨을까? 그리고 글을 깨친 어르신들의 삶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많이 궁금하다. 어르신들은 이제 자신의 이름을 읽고 쓸 수 있다. 신문을 읽을 수 있다. 손자에게 편지를 쓸수 있다. 살아온 이야기를 글로 남길 수 있다. 시인의 길을 갈 수도 있다. 이제 100세 시대가 왔으니 어르신들은 새로운 꿈을 가지셔도 된다. 이 노래를 부르셔도 된다.
"여기 숨쉬는 이 시간은 나를 어데로 데려갈까"
나는 이 노래를 대학원에 들어가서 처음 들었다. 나는 그때 15년차 현직 교사였다. 나는 대학원에 갈 형편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39세라는 나이가 걸림돌이었다. 아이 셋을 데리고 청주까지 가다니? 경제적인 여유도 없을 때였는데 나는 청주유학을 감행했다. 1995년 봄부터 2년 동안 나는 공부에 매달릴 수 있었다. 정말로 하고싶었던 공부. 그러나 힘들었다. 39세에 학교를 떠나서 대학원에 들어온 교사는 없었다. 동료교사들은 우스개 소리로 나를 '지도교수'라고 했다.
그런데 65세가 되어 돌아보니 그 시절이 까마득한 옛날같다. 39세인 나를 '늦깎기'라고 부르곤 했는데, 지금 생각하니 우습다. 그때 나는 '늦깎기'가 아니라 '햇병아리'였다는 생각도 든다. 내친김에 그때 박사과정까지 도전했더라면 나는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그때는 아이들도 커가고 있었기에 "이만하면 됐다."하면서 청주를 떠나왔지만, 아쉬움은 남았다.
대학원에서 2년을 지낸 뒤에 나는 학교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두 권의 책을 썼다. 대학원에서 밤새워 공부하지 않았다면 나는 책을 쓸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 후로, 여기저기 강사로 불려다니기도 했다. 모두 청주유학이 가져다 준 열매였다. 청주 시절은 나에게 가장 행복한 순간으로 기억될 것이다.
나는 2013년 9월에 명예퇴직을 했다. 퇴직을 한 뒤에는 전공을 떠날 수 있어서 좋았다. 평소에 하고 싶었던 분야를 찾아서 공부하기로 했다. 맨 먼저 광주시청자 미디어센터에서 영상촬영과 편집과정을 공부했다. 프리미어 프로그램을 재미있게 공부했고, 촬영장비도 마련했다. 내가 편집한 영상이 TV전파를 탔을 때는 달에 착륙한 것 만큼이나 짜릿했다. 내가 가끔 블로그에 짧은 영상을 올릴 때가 있는데, 다 그때 배운 실력이다. 요즘에는 키네마스터와 스크린 레코더를 스마트폰에 내려받아서 영상을 편집한다.
용봉 작은 도서관에서 개설한'내 생애 첫 작가수업'에도 참여했다. 중견 작가의 지도아래 6개월 쯤 공부했다. '여옥이 누나'라는 제목을 붙인 단편소설이 태어난 것도 그때의 일이다. 작품성의 유무를 떠나서 나의 어린시절이 녹아든 소설이기에 애착이 간다. 나는 지금도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나 오스카 와일드의 '행복한 왕자'같은 소설을 써보는 꿈을 갖고 있다.
'작가수업'강좌에서 함께 소설을 공부했던 전순덕 씨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대부분의 수강생들이 그랬던 것처럼 50이 지나서야 소설을 쓰기시작 한 그녀는 눈부신 글솜씨로 우리를 놀라게 했다. 작가수업이 끝난 후로도 그녀는 계속해서 글을 썼다. 본격적인 문학수업을 받는다고 하더니 얼마 후에 등단을 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드디어 소설가의 꿈을 이룬 것이다. 사람들의 심금을 울릴 작가가 될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믿었다. 모두 진심에서 우러나는 박수를 보냈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나지 않아서 그녀는 저 세상으로 떠나버렸다.
지병이 있었으면서도 펜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는 그녀. 전순덕 씨는 나이 50에 작가수업을 받은 일을 어떻게 생각할까? 글쓰기에 도전하는 대신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지키다가 세상을 떠난 것이 더 행복했을까? 나는 가끔 그녀가 남기고 간 소설을 읽어본다. 소설보다 더 소설같은 그녀의 삶과 꿈을 생각해 본다.
나는 요즘 한가하다. 얽매인 곳이 없다. 그러면서도 마음은 많이 바쁘다. 광주관련 자료를 모아야 한다. 스토리를 만들고 블로그에 만화를 올려야 한다. 책으로 펴내려면 원고도 정리해야 한다. 나에게 <김선생의 광주사랑>은 나로서는 최후의 미션이요 숙제다.
그렇다고 다른 꿈이 없다는 말은 아니다. 유화를 배워보는 꿈. 초급 수준이라도 영어회화를 제대로 익히는 꿈. 시를 써보는 꿈. 디지털 만화를 그리는 꿈. 중국어 기초를 배우는 꿈. 일러스트레이터 같은 편집 프로그램을 익혀서 내 맘에 꼭 드는 책을 만드는 꿈. 등등. 나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 나는 <광주 시사점>을 비롯한 여러 사이버 교실을 찾는다. <광주 시사점>에는 300개에 이르는 강좌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시간만 투자하면 무엇이든, 비용을 들이지 않고 배울 수 있으니 그저 놀라울 뿐이다.
나는 특별히 성인문해교육 수강생들을 보면서 큰 자극을 받곤 한다. 70이라는 연세에도 포기하지 않고 한글 깨치기에 도전하는 어르신들도 있는데 내가 허송세월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푸른 하늘을 마지막으로 바라보는 날까지 나의 모짜르트를 가꾸고 싶다. 전순덕 씨처럼 최후의 순간까지 생명을 불태우고싶다. 못 이룬 꿈을 차디찬 묘비에 새기는 일을 나는 결코 하지 않으리라. 80이 되고 90이 될 때까지 나는 룰라의 노래를 들으리라.
여기 숨쉬는 이 시간은 나를 어디로 데려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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