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광주평생교육진흥원에서 발행하는 웹진 '무돌씨의 마르지 않는 샘' 26호가 나왔다. 이번호에서는 성인문해교육 참가자들이 쓴 작품이(영상) 눈길을 끈다. 아래의 글은 문해교육으로 한글을 깨친 어르신들이 쓴 詩를 보고서 느낀 소감을 적은 것이다.
몇 년 전의 일이다. 그 때는 근무하던 직장에서 명예퇴직을 하고 집에서 지내고 있었다. 늘 시간에 쫒기던 나는 주체할 수 없이 주어지는 시간을 감당하기가 힘들었다. 그러다가 시간을 더 의미있게 보낼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성인문해교육이라는 말을 만난 것은 그 때다. 나는 눈이 번쩍 떠졌다. 문해교육이라면 문학이해 교육일 것이다. 문해(文解)=문학이해(文學理解)로 생각되었다. 거기 가면 시인이나 소설가를 만날 수 있고, 문학을 공부할 수 있으려니! 문학의 세계를 늘 사모하던 나는 기대에 부풀었다.
나는 문해교육을 하는 장소와 시간을 알아보기로 했다. 안내사항을 꼼꼼히 살펴보던 나는 멈칫하였다. 내가 생각하던 문해교육이 아니었다. 학교를 다니지 못해서 평생 글자를 쓰지도 읽지도 못하는 어르신들을 위한 교육. 그러니까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대상으로 한글을 가르치는 프로그램이었다. 문해(文解)교육은 문자이해(文字理解)교육이었다. 나는 문해(文解)라는 단어의 비밀스런 의미를 알았을 때, 나도 모르게 눈이 촉촉해졌다. 문자이해(文字理解)와 문학이해(文學理解)의 사이에 선 나는 부끄러웠다. 문학의 이해를 바라는 나의 바램은 문자이해를 바라는 어르신들의 그것앞에 흔들렸다. 나는 글쓰기는 고사하고 읽을 수도 없는 어른들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문맹(文盲)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고통은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보름달에 어리는 계수나무 그림자 같은 것이었다.
사실 나의 어머니도 학교는 문턱에도 가보지 못하고 80평생을 살다 가셨다. 그래도 한글은 읽을 수 있었다. 버스 운전석 아래에 쓰여진 행선지를 읽으시는 것을 본적이 있다. 어머니는 "저 버스 해남가는 차 맞냐?"이렇게 묻지 않으셨다. 버스 앞으로 다가가서 천천히 읽으셨다 "해- 남-"이라고. 그때 어머니 얼굴을 비추던 밝은 빛은 무엇이었을까? 어머니는 누구보다도 현명하고 많이 배운 어른으로 보였다. 사실 어머니는 지혜로우셨고, 서당 선생인 아버지보다도 좋은 기억력을 가지신 분이었다. "재주보게 재주보게 애온(뜻 미상) 애기 재주보게"하시면서 처녀적에 부르던 노래를 70년 뒤에도 모두 다 기억해 내시는 분이었다. 어깨춤을 추면서 가사와 곡조를 되뇌이기 시작하면 끝이 어딘지 알 수가 없었다. 옛날에 총이 좋은 사람들은 삼국지나 유충렬전을 달달 외웠다는 데 나는 그 말을 믿는다. 어머니에게서 깜짝 놀랄만한 기억력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런 분이 제대로 배웠으면 신사임당이나 허난설헌같은 분 못지않은 분이 되었으리라. 어머니가 돌아가신지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나는 제대로 배우지 못한 어머니를 생각하면 우울해진다. 아쉬움이 남는다.
그런데 천만 다행으로 어머니는 댕기머리 처녀시절에 일찌감치 한글을 깨우칠 기회를 만났다. 하늘이 준 기적같은 선물이었다. 어느 여름에 동네에 야학이 열렸다. 내가 역사책에서 사진으로만 보았던"브 나르도"의 파도가 어머니 계신 산골짜기까지 밀려 온 것이다. 그 야학에 다니면서 어머니는 한글을 배웠다. 어머니가 야학에 대해서 들려준 말씀이 있다. 한글을 가르치던 선생(학생)에게 들었다는 한 마디. "가에다 기역하면 각" 그리고 집안 어른들이 했다는 말도 있다. "여자는 글을 배우면 안된다. 여자는 출가외인인데, 글을 가르치면 자꾸 친정으로 편지나 쓰게 된다." 어머니는 며칠 만에 한글을 깨칠만큼 영특했으나 어른들의 반대로 야학은 더이상 다닐 수 없었다. 그리고 어머니에게 배움의 기회는 찾아오지 않았다. 80평생 단 한 번도. 나는 처녀시절의 어머니 모습이 그립다. 어디까지나 상상으로 그려볼 뿐이지만, 그날은 밝은 보름달이 둥실 떠 있었을 것이다. 야학이 열리는 교회당은 이웃 동네에서까지 모여든 처녀총각들로 발디딜 틈이 없었으리라. 저녁밥도 먹는둥 마는둥 어머니는 예배당으로 뛰어갔으리라. 아! 어머니는 눈을 반짝이면서 선생을 뚫어져라 바라보았으리라. "가에다 기역하면 각!" 어머니는 목청이 터져라 외쳤으리라. 그날 밤 대낮같이 하늘을 밝히던 둥근 보름달이 어머니의 80평생을 비출 것을 어머니는 알고 있었을까?
광주평생교육진흥원에서 문해교육을 받은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글짓기 대회를 했다는 소식이다. 어르신들의 작품을 읽으면서 나의 어머니를 생각했다. 문해교육은 어르신들에게 둥근 보름달이다. 남은 여생을 비출 밝은 빛이다.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어르신들께 감사드린다. 평생교육을 기획하고 어르신들에게 크나큰 보람을 안겨주신 분들이 많다. 그 노고에 마음의 꽃다발을 보낸다.
끝으로 72세 박현순 어르신의 글을 소개한다. 글을 깨우친 어르신은 "눈물이 난다"는 말씀을 반복하신다. 나는 그 말씀이 내 어머니의 말씀으로 들린다. 요즘은 100세 시대이니 어르신은 더 많이 공부하실 수 있다! "눈물을 거두시고 맘껏 웃으셔도 됩니다. 어머니!"
김선생의 광주사랑 블로그에 접속하시면 더 많은 광주의 이야기를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