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백승균 교수의 강의를 듣기 위해 모인 인파로 미로센터가 북적였습니다. 8월 6일, ‘삶의 치유로서의 인문학’ 개강식과 함께 첫 강연인 <삶의 철학으로서 인문학> 강의가 성황리에 이루어졌는데요. 지역민을 대상으로 인문학 무료강좌가 개설되었다는 소식에 다양한 연령대의 광주시민들이 강연을 듣기 위해 이곳을 찾았습니다.
이번 특강은 광주 시민을 대상으로 한 시민대학 프로그램 지원사업으로, 광주평생교육진흥원과 광주광역시가 공동으로 주최하였고 인문학 둥지 카페 필로소피아에서 주관하였습니다. 성진기 전남대 철학과 명예교수가 이끄는 인문학 둥지 카페 필로소피아는 인문학 대중화 운동을 위해 22년 가까이 강좌를 운영해 오고 있습니다.
프로그램 개강일이었던 이날은 김현옥 피아니스트와 박효은 첼리스트의 감미로운 연주가 프로그램의 시작을 알렸고, 이번 프로그램 전반을 기획하신 성진기 교수님의 간단한 소개멘트가 이어졌습니다.
“‘삶의 치유로서의 인문학’은 종래의 계몽적인 문학 강의를 지양하고 삶의 부정적 요소를 치유할 수 있는 인문학적 지혜 터득을 통해 스스로 자신의 삶을 성찰하는 동기를 부여하는 실천형 문학강좌입니다. 따라서 철학, 종교, 문학 등 다앙한 주제의 강연과 공연, 영상물 상영이 함께 하는 프로젝트라고 볼 수 있습니다.”
첫 강의는 백승균 계명대 명예교수의 ‘삶의 철학으로서의 인문학’을 주제로 이루어졌습니다. 백승균 교수는 대한철학회 이사장이며, 계명대학교 명예교수로서 목요철학원장직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퇴임 후에도 저서 출간 등 학문 활동을 왕성하게 지속하고 계십니다. 특히 교수님의 철학정신을 기리기 위해 교수님의 호를 딴 ‘운제철학상’이 만들어졌다고 하니 철학분야에서 교수님의 위상을 감히 짐작해 볼 수 있었습니다.
개강식과 강의가 성황리에 종료된 후, 백승균 교수를 찾았습니다.
Q 만나서 영광입니다, 백승균 교수님. 먼저 강의를 진행하시게 된 소감과 인사 말씀 부탁드립니다.
해방 이후 우리사회는 미성숙했지만 산업화를 통해 개발도상국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민주화의 새로운 길을 마련하는데도 큰 성과를 거뒀습니다. 하지만 되돌아볼 겨를도 없이 디지털 정보사회가 인공지능을 앞세워 제4차 산업혁명의 기술로 우리의 일상적 삶과 인식방식을 무섭게 바꿔놓고 있습니다. 심지어 주객(사람과 로봇)을 전도시키고 있습니다. 누구도 이 흐름을 거스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되돌아보고자 했습니다.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는 학문은 자연과학이나 사회과학보다는 인문학입니다. 인문학의 대상은 사람입니다. 사람이란 무엇이고, 왜 사람의 삶인가를 되묻는 학문입니다. 이것은 본래의 자기 자신으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나와 있기 때문에 자신을 되찾기 위한 물음입니다.
이러한 물음에 대한 해답으로, 성진기 교수님은 「카페 필로소피아」라는 이름의 철학 카페를 통해 광주 인문학 분야에서 큰 성과를 내고 있습니다. 이에 더해 광주평생교육진흥원에서 「삶의 치유로서의 인문학」이라는 주제로 시민들과의 인문학적 소통을 촉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공고하게 자리 잡은 광주 인문학이 광주광역시민뿐 아니라 타 지역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리라 믿습니다.
Q 오늘 강의 주제 또한 ‘삶의 철학으로서 인문학’입니다. 인문학을 더 자세히 말씀해주세요. 위 주제를 선택하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인문학은 근본적으로 삶의 현장에서 드러나지않는 것에 주목하고자 하는 학문입니다. ‘사실’은 드러나 보이나, ‘의미’는 그대로 드러나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직시하지 않는 사람에게 ‘의미’는 ‘없음’, 즉 ‘무(無)’로 보일 뿐입니다. ‘무’란 무엇인가에서 ‘무’는 결코 ‘없음’ 자체가 아니라 역설적으로 ‘있음’, 즉 ‘유(有)’ 혹은 존재입니다.
그래서 인문학은 목적 자체를 깨닫게(覺) 합니다. 자기 자신을 깨닫는 사람은 현재에서 미래를 선취하는 개방형의 사람이 됩니다. 미래란 엄밀한 의미에서 미래를 ‘각(覺)’하는 사람들에게만 현실로 다가올, 그러나 아직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현실로 존재합니다.
사람이 백 년을 살았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1년을 사람답게 살았다는 ‘의미’가 더욱 중요합니다. 인간 삶의 현장에서 보면 월경 역시 단순한 생리적 현상의 사실이 아니라 생명을 잉태할 수 있다는 의미가 중요하고, 눈물도 그 의미가 중요하지, ‘눈물의 98% 물이다’라는 사실이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심지어 성경(고전 13장*)의 ‘사랑’은 ‘~이다.’가 아니라 ‘~아니다’ 라고만 쓰고 있다는 말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고전 13:4-8)
여기에는 소위 ‘부정성’의 큰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진정한 승리는 정복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패배자의 마음 가운데 있다”라는 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죄의 대속자로서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그랬고, 생의 금욕자로서 붓다가 그랬으며, 또한 무지의 지를 갈파한 소크라테스가 그랬습니다. 하물며 오늘을 사는 우리 자신들이라고 해서 그렇게 될 수 없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사람됨의 가치를 으뜸으로 삼는 「삶의 철학으로서 인문학」이 인간의 생각뿐 아니라 삶 자체를 변화시키는 학문임을 광주시민들에게 전하고 싶었습니다.
Q 계명대 목요철학 원장직을 맡아 매주 목요일 목요철학인문포럼을 열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교수님께서 생각하시는 철학의 중요성과 의미는 무엇인가요?
목요철학 인문포럼은 1980년 「목요철학세미나」로 시작하여 올해 40주년을 맞이합니다. 그동안 세월의 질곡 속에서 여러 갈등이 있었고, 정치적 편향성에 휘둘리기도 했지만 꿋꿋이 인문학을 고수해 왔습니다. 정치의 길이 ‘사실’의 길이라면 인문의 길 혹은 문화의 길은 ‘의미’의 길이었습니다.
한 나라에서 정치나 경제문제가 인문이나 문화보다 우선하는 것은 정치가 인간 삶의 체제 자체를 뒤엎을 수 있기 때문이고, 경제가 인간의 삶을 순식간에 나락으로 떨어뜨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치경제의 위력은 인간 삶의 문화 의식에 근거합니다. 정치는 득세하는 데만 눈독을 들이고, 경제는 득물하는 데만 허겁지겁한다면, 문화(인문학)는 이들을 넘어서 득물하기보다는 먼저 득인하고자 하고, 나아가 득심하는데 있습니다.
정치는 한날에다 목숨을 걸고, 경제는 한때만 번성하지만, 문화는 사람으로 하여금 내일에서 오늘을 행복으로 살게 합니다. 한류를 보십시오. K-Pop을 보고 BTS를 보십시오. 그들에게 우리 삶의 철학적 문화 의식이 없었다면 그것이 어떻게 예술로 승화되었겠습니까! 신문에서조차 첫째 면은 정치 기사, 둘째 면은 경제 기사, 셋째 면은 사회 기사가 실리고 나서야 문화면의 기삿거리가 실리곤 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독자는 신문의 문화면 깊이를 예의주시합니다. 서구의 주요 신문들을 보십시오. 철학은 나타나 있는 현상을 주시하지 않고 그런 현상을 가능케 하는 근거를 주시합니다. 철학은 법칙을 내세우는 자연과학이나 규범을 내세우는 사회과학과 달리 사람됨의 가치를 근거로 ‘자유함’을 구가합니다. 철학함은 자신을 소유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을 스스로 창조하는 힘입니다. 이런 힘은 과거를 미래로 바꾸는 힘이고, 죄인을 성인으로 거듭나게 하는 힘입니다. 이것은 자기가 자기를 버릴 때 비로소 새로운 자기를 되가질 수 있음을 말합니다.
Q 철학을 포함하여 인문학의 위기라고 볼 수 있는 현대산업사회에서 철학의 대중화를 위해 어떤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나요?
철학은 고고한 학문이 아닌 현실의 학문입니다. 현실이란 ‘지금’과 ‘여기’를 말합니다. ‘지금’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로 이어지는 1차원의 시간이고, ‘여기’는 가로·세로·높이로 이루어지는 3차원의 공간입니다. 결국 현실은 시간과 공간으로 이루어지는 4차원의 세계입니다.
4차원의 현실세계로서 현대 산업사회는 과학기술시대의 지식정보사회로, 과거와 미래의 지평을 내던진 채 자기 없는 현재에만 집착하여 자기 자신의 상실도 의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가상공간이 현실공간으로 전도되는 디지털정보사회가 극치를 이루고 있고, 감성적 욕구가 철학적 논리성마저 마비시키며 회의나 비판, 나아가 사유 자체를 용납하지 않는 상황임에도 자기반성은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철학을 아무리 대중화한다고 해도 흥밋거리의 이러저러한 잡탕 동네인문학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적어도 ‘철학’인 이상 기본적으로 짚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전후맥락의 논리적 연관성이 있어야하고, 가상이든 현실이든 그 자체의 인식론적 시도가 있어야 하며, 또한 형이상학이 용납되지 않는 디지털시대에서 인간 이상(以上)과 이하(以下) 예시가 그때마다 따라야합니다. 이에 대한 노력은 본래의 철학이 기능이나 기술을 목적으로 하지 아니하였고, 기능과 기술을 관리할 수 있는 내적 능력의 함양이 목적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는 데서 비롯된다고 생각합니다.
Q 끝으로 강의를 듣는 시민들과 오늘 특별히 참석한 광주 시민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씀 있으신가요?
인문학 강좌는 돈을 벌 수 있는 재테크 강좌도 아니고 건강을 챙길 수 있는 의학 강좌도 아닙니다. 모든 강좌가 대상을 우리의 눈앞에 두고서 이뤄지지만, 인문학 강좌만은 그 대상을 우리의 눈앞에서 찾지 아니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데서 찾습니다. 그래서 인문학은 자연이나 사회 이전에 ‘사람’을 대상으로 하고, 그 사람 역시 ‘나’로부터 시작합니다.
인간이란 무엇이고, 나는 누구인가? 나 역시 궁극의 대상은 자기 자신입니다. 자기 자신을 철학적으로 되돌아보는 것이 자기반성이고 자기성찰입니다. 자기성찰로부터 나를 정립하고 우리를 되돌아보며, 우리 밖의 자연을 바라다보게 됩니다. 인문학이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학문이라면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의 삶입니다.
삶에서는 인간의 문화를 가능케 하는 가치론이 성립하고, 앎에서는 우리의 판단을 가능케 하는 인식론이 이뤄지며, 그리고 있음에서는 인간의 근거를 묻게 하는 존재론이 성립합니다. 이에 현실에서는 인식론이나 존재론보다는 삶의 가치론으로서 문화가 가장 우선합니다. 삶이 인간의 가치를 문화로서 극대화하기 때문입니다. 문화적 가치론에서는 진이나 선보다 미가 우선합니다. 미는 눈에 보이는 대상으로 존재하지 않고 미 자체로서 존재합니다. 18세의 절세미녀라 해도 세월 앞에서는 무력할 뿐입니다. 미에 인문학이 더해지면 예술로 승화됩니다.
40년 동안 저희 「목요철학 인문포럼」은 자신의 주장과 팽팽한 논쟁으로 이어왔었지만 인문학을 중심으로 한 인류문화사를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고찰하는 대장정에 임해왔습니다.
이것이 “대구인문학‘의 발판을 마련하는 것이라면 이제 카페 필로소피아를 통해 ”광주인문학“이 광주광역시에서 이뤄지길 기대합니다. 광주에서는 「광주인문학」이, 그리고 대구에서는 「대구인문학」이 쌍벽을 이뤄 전국에서의 귀감이 되길 희망합니다. 시민여러분들이 적극 참여하실 때 이미 이뤄질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삶의 치유로서의 인문학’ 프로그램은 8월 6일 백승균 교수의 <삶의 철학으로서 인문학> 강연을 시작으로 매주 목요일 저녁 7시 동구 미로센터에서 15주 동안 진행됩니다.
이 강좌는 광주광역시 아리바다를 통해 동영상으로 제작되어 광주평생교육진흥원 유튜브와 진흥원 홈페이지 온라인 시민대학을 통해 업로드될 예정이라고 합니다. 진흥원 홈페이지에서 온라인 수강이 가능하다고 하니, 방문이 어려운 분들은 아래 링크를 통해 인문학적 소양을 쌓아보는 건 어떨까요? (https://www.gie.kr/pg/peopleUnivList.do?pageId=www35)
- 문경은·문민지
- 제4기 광주평생교육 웹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