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코너는 중․고등학교에서 지리교사로 근무하다 퇴직 후
웹툰 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김길남 웹툰 작가의 연재 코너입니다.
김길남 웹툰 작가가 운영하고 있는 광주사랑 블로그(http://yeisee.blog.me)에는
광주의 역사, 문화, 인물 등 다양한 이야기가 4컷으로 그려진 만화와 함께 담겨 있는데요. 퇴직 이후 열심히 수집한 광주에 대한 자료의 핵심만 쏙쏙 뽑아 만화로 제공한 광주 사랑 이야기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광주의 이야기를 흥미롭게 접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광주평생교육 웹진 「무돌씨의 마르지 않는 샘」을 통해 연재되는 김선생의 광주사랑! 많은 관심 부탁드리며, 이번 주제는 한국인들 가슴에 자부심을 심어준 아시아의 물개, 조오련입니다.
<편집자 주>
한국인들 가슴에 자부심을 심어준 아시아의 물개, 조오련
조오련이하고 바다거북이하고 둘이서 헤엄치면 누가 이길 것 같노? 조오련. 거 봐라! 아이다. 바다거북이가 이길긴데
영화 '친구' 앞 부분에 아이들이 물놀이 하면서 나누는 대사다. 지금은 수영선수하면 박태환이지만 1970년대에 수영의 대명사는 조오련이었다. 그 시절 조오련은 복싱선수 홍수환, 박치기왕 김일과 함께 국민의 영웅이었다. 아니 아시아의 우상이었다. 그의 별명을 보더라도 한국을 뛰어넘은 선수였다. '아시아'의 물개였던 것이다!
고향인 해남에서 어렵게 살다가 해남고등학교를 자퇴하고 서울로 올라간 조오련은 누구보다도 존재감이 없는 무명선수였다. 수영복이 없어서 사각 팬티를 입고 출전하기도 했다.
1970년 12월 12일. 방콕 아시안 게임 수영 남자 자유형 400m 결승에서 18세의 고등학생이었던 조오련이 4분 20초 20으로 대회 신기록을 세우면서 금메달을 땄을 때, 경기장에는 한국 기자가 하나도 없었다. 조오련 선수가 메달을 딸 것을 기대한 기자가 없었던 것이다. 뒤늦게 금메달 소식을 들은 기자들이 조오련이 머물던 호텔로 몰려들었다. 그날 밤 조오련은 다시 수영복을 입고 금메달을 목에 걸어야 했다. 그렇게 해서 기자들은 신문에 실을 사진을 만들어 냈다는 후문이다.
조오련은 이 대회 남자 자유형 1,500m에서 또 다시 금메달을 움켜 쥐어 세상을 놀라게 했다. 수영경기에서 메달을 싹쓸이 해오던 일본도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조오련의 금메달 사냥은 4년 뒤에도 이어졌다. 1974년 아시안 게임은 테헤란에서 열렸다. 여기에서 그는 자유형 400m와 1,500m에서 동시에 금메달을 따냈다. 두 대회 연속 2연패를 한 것이다. 이렇게 조오련은 영원한 아시아의 물개로 남게 되었다. 그는 1978년 선수생활에서 물러나기까지 한국 신기록 33개, 대회 신기록 17개를 기록했다. 수영선수로는 전무후무한 성과였다.
그는 은퇴후에도 활발하게 활동했다. 1989년에는 조오련 수영 교실을 열었다. 1993년에는 조오련 스포츠센터를 세워 후진 양성에 주력하였다. 1998년 2월 부터는 대한 수영 연맹 이사를 맡아서 봉사하였다.
그는 후진양성을 하면서도 여늬 선수와는 달랐다. 잠시도 도전을 멈추지않았다. 1980년에는 대한해협 횡단에 도전했다. 55㎞ 바닷길을 13시간16분10초만에 주파했다. 1982년에는 도버해협을 9시간 35분에 횡단하여 지구촌의 화제가 되었다. 2002년에는 대한해협을 다시 횡단했다. 2003년에는 한강 700리를 거슬러 종주하는데 성공했다.
2008년에 조오련 선수가 찾아간 곳은 우리의 막내 독도였다. 이번에는 동해의 푸른 파도를 가르면서 독도를 33바퀴나 돌았다. 33바퀴는 1919년에 3.1만세운동을 주도했던 민족대표 33인의 얼을 기리는 의미였다고 한다. 그는 남다른 애국심의 소유자였던 것같다.
조오련 선수의 독도 사랑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2005년에 두 아들과 함께 아무도 생각지 못한 도전을 감행했다. 울릉도~독도구간을 3부자가 릴레이로 헤엄쳐서 건너는 도전이었다. 조오련ㆍ조성웅ㆍ조성모 3부자는 울릉도~독도 구간 93Km를 18시간만에 주파했다.
조오련은 도전의 다른 이름이었다. 그의 삶 자체가 도전이었다.
영화 '친구' 앞 부분에 아이들이 물놀이 하면서 나누는 대사다. 지금은 수영선수하면 박태환이지만 1970년대에 수영의 대명사는 조오련이었다. 그 시절 조오련은 복싱선수 홍수환, 박치기왕 김일과 함께 국민의 영웅이었다. 아니 아시아의 우상이었다. 그의 별명을 보더라도 한국을 뛰어넘은 선수였다. '아시아'의 물개였던 것이다!
고향인 해남에서 어렵게 살다가 해남고등학교를 자퇴하고 서울로 올라간 조오련은 누구보다도 존재감이 없는 무명선수였다. 수영복이 없어서 사각 팬티를 입고 출전하기도 했다.
1970년 12월 12일. 방콕 아시안 게임 수영 남자 자유형 400m 결승에서 18세의 고등학생이었던 조오련이 4분 20초 20으로 대회 신기록을 세우면서 금메달을 땄을 때, 경기장에는 한국 기자가 하나도 없었다. 조오련 선수가 메달을 딸 것을 기대한 기자가 없었던 것이다. 뒤늦게 금메달 소식을 들은 기자들이 조오련이 머물던 호텔로 몰려들었다. 그날 밤 조오련은 다시 수영복을 입고 금메달을 목에 걸어야 했다. 그렇게 해서 기자들은 신문에 실을 사진을 만들어 냈다는 후문이다.
조오련은 이 대회 남자 자유형 1,500m에서 또 다시 금메달을 움켜 쥐어 세상을 놀라게 했다. 수영경기에서 메달을 싹쓸이 해오던 일본도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조오련의 금메달 사냥은 4년 뒤에도 이어졌다. 1974년 아시안 게임은 테헤란에서 열렸다. 여기에서 그는 자유형 400m와 1,500m에서 동시에 금메달을 따냈다. 두 대회 연속 2연패를 한 것이다. 이렇게 조오련은 영원한 아시아의 물개로 남게 되었다. 그는 1978년 선수생활에서 물러나기까지 한국 신기록 33개, 대회 신기록 17개를 기록했다. 수영선수로는 전무후무한 성과였다.
그는 은퇴후에도 활발하게 활동했다. 1989년에는 조오련 수영 교실을 열었다. 1993년에는 조오련 스포츠센터를 세워 후진 양성에 주력하였다. 1998년 2월 부터는 대한 수영 연맹 이사를 맡아서 봉사하였다.
그는 후진양성을 하면서도 여늬 선수와는 달랐다. 잠시도 도전을 멈추지않았다. 1980년에는 대한해협 횡단에 도전했다. 55㎞ 바닷길을 13시간16분10초만에 주파했다. 1982년에는 도버해협을 9시간 35분에 횡단하여 지구촌의 화제가 되었다. 2002년에는 대한해협을 다시 횡단했다. 2003년에는 한강 700리를 거슬러 종주하는데 성공했다.
2008년에 조오련 선수가 찾아간 곳은 우리의 막내 독도였다. 이번에는 동해의 푸른 파도를 가르면서 독도를 33바퀴나 돌았다. 33바퀴는 1919년에 3.1만세운동을 주도했던 민족대표 33인의 얼을 기리는 의미였다고 한다. 그는 남다른 애국심의 소유자였던 것같다.
조오련 선수의 독도 사랑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2005년에 두 아들과 함께 아무도 생각지 못한 도전을 감행했다. 울릉도~독도구간을 3부자가 릴레이로 헤엄쳐서 건너는 도전이었다. 조오련ㆍ조성웅ㆍ조성모 3부자는 울릉도~독도 구간 93Km를 18시간만에 주파했다.
조오련은 도전의 다른 이름이었다. 그의 삶 자체가 도전이었다.
또 다른 광주의 ‘역사’에 대해 궁금하신가요?
김선생의 광주사랑 블로그에 접속하시면 더 많은 광주의 이야기를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김선생의 광주사랑 블로그에 접속하시면 더 많은 광주의 이야기를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