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포커스Ⅰ 의향 + 예향 + 미향호남의 문화로 본 ‘광주’ 나경수 / 전남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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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남은 호수의 남쪽이라는 뜻을 가진 지리적 명칭이다. 본디 중국의 지명에서 차용한 말이다. 후난성(湖南省)은 중국에서 두 번째로 큰 담수호인 둥팅호(洞庭湖)의 남쪽에 위치하며, 둥팅호를 기준으로 후베이(湖北)와 구별된다. 우리나라에서 호수의 남쪽이라는 축자적인 뜻이 적용되는 근거를 찾자면 그것은 금강이라고 한다. 호남을 지칭하는 다른 말도 통용된다. 행정적 명칭으로는 전라도요, 문화적 명칭으로는 남도라는 말도 함께 쓰이고 있다. 금강과 섬진강 하구를 기준으로 이남과 이서 지역을 지칭하는 호남은 호남문화라는 하나의 문화적 공동체를 이루는 문화권적 단위가 되기도 한다.

  한편 호남은 동일한 지리적 환경에 그치지 않고 동일한 집단적 경험으로서 역사 역시 공유해 왔다. 따라서 호남문화라는 말 속에는 문화권적 개념과 문화사적 개념이 모두 함의되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더더구나 집단적 인성을 공유한 호남인이 함께 한다. 우리는 인간, 시간, 공간의 질료가 사회, 역사, 지리를 구성하며, 그러한 조건들의 합성을 통해서 소위 호남의 문화가 구성되는 것을 알게 된다.

  호남문화의 이해를 위한 수많은 연구가 있어 왔다. 개별적인 논의는 접어두고라도 체계화를 통한 종합적 이해에 이른 연구도 큰 성과를 이룬 바 있다. 이해준은 예술성, 포용성, 비판성, 실천성, 민중성을 호남지역의 특성으로 든 바 있으며, 최협은 독특한 문화요소의 발생과 분포지역으로서 호남문화, 소외, 저항, 그리고 한의 역사적 산물로서 호남문화, 특정 기질 또는 인성이 표출되는 지역단위 개념으로서의 호남문화, 건강한 문화유지의 장으로서의 호남문화 등 네 가지 범주로 호남문화를 분류한 바 있다. 또한 김동수는 특정 문화요소의 공유로서의 호남문화론, 특수한 역사적 경험의 공유에 따른 특성으로서의 호남문화론, 주민이 공유한 특정 기질 또는 인성에서 보는 호남문화론, 호남인의 역할을 통해 호남 역사의 특성을 규명하는 호남문화론 등으로 호남문화에 대한 체계화를 시도한 바 있다.

  이들 연구는 호남의 문화적 특질 및 호남인의 인성에 대한 총체적 이해를 위한 지춘상 교수의 연구로부터 촉발된 것들로 보인다. 특히 문화와 인성(또는 기질)을 묶어 지역문화의 특성을 파악하고자 하는 방향은 적정한 것으로서, 이들 연구의 집적으로 인해서 호남문화와 호남인의 인성에 대한 많은 이해가 가능해졌다.

  한편 이러한 학술적 노력과 함께 호남을 일컫는 또 다른 지역문화적 특성이 있는 바, 흔히 의향(義鄕), 예향(藝鄕), 미향(味鄕) 등으로 불리는 예이다. 절의를 숭상하고 의기가 충만한 고장이라는 뜻에서 의향이요, 삶의 질을 비옥하게 하는 예술이 살아 숨쉬는 고장이라는 뜻에서 예향이며, 어느 지역보다도 음식이 맛깔스럽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로서 그래서 미향이라고 이름을 날리고 있다. 이들은 호남이라는 지역이 머금고 있는 소위 3대 문화 표상(culture images)이다.

의향 호남

  호남인의 인성은 호남의 문화와 먼 거리에 있는 것이 아니다. 호남의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호남인의 집단적 인성을 함께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의향이라는 호남의 문화적 표상에 대해 호남인의 집단적 인성인 의기와 관련짓는 것은 그래서 필요하다.
호남인의 의기는 통시적 역사에서 뿐만 아니라 근현대의 공시적인 상황을 통해서도 여실히 확인되는 바다. 임진왜란 당시 전국적으로 의병장과 의병의 봉기와 활약이 두드러졌던 곳도 호남지역이며, 구한말 의병활동을 주도했던 곳도 바로 호남지역이었다. 동학혁명의 기포지였으며, 최후의 항전을 불사했던 곳도 장흥과 진도 등 호남지역이다. 일제강점기 때 호남지역에서 일어났던 여러 가지의 소작쟁의는 물론 광주학생운동, 그리고 무엇보다도 1980년 광주5.18민주화운동이 그 전형일 것이다. 누가 그러자고 해서가 아니라, 일련의 동일한 구조적 상황이 벌어졌을 때 그들의 마음 속에 잠재되어 있던 의기가 밖으로 표출되었던 것이다.

예향 호남

  예향이라는 말에 대한 부정적 시각도 없진 않다. 예를 들면 현대사회와 관련지어서 소외받은 호남지역을 미화하기 위해 만들어낸 군사독재의 산물이라거나, 전근대사회와 관련지어 예향을 대표하는 갖가지 요소들은 거의 피지배층의 생활문화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이성보다는 감성이 강한 호남인의 집단적 인성을 보여주고 있다는 측면에서 자랑스러울 것이 못된다는 주장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전통문화예술로 꼽히는 것들 중에서 시가문학과 도자기예술, 그리고 판소리만 두고 보더라도 이들이 호남을 모태로 하고 있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문학과 미술, 그리고 거의 모든 예술적 장르에서 호남은 다른 지역에 비해 압권의 성취도를 달성했으며, 이들은 모두 한국을 대표할 수 있는 자랑스러운 문화예술유산인 것이다. 문학과 미술, 그리고 음악 등 각 방면에서 호남의 전통예술은 최고의 평가를 받아왔으며, 이러한 평가와 현실을 바탕으로 하여 예향이라는 명성을 얻었던 것이다.

미향 호남
  호남은 자타가 공인하는 맛의 고장으로도 꼽힌다. 고급식당은 말할 것도 없고, 일반 대중식당에서도 비교적 싼값에 맛난 음식을 즐길 수 있다. 풍부한 먹거리가 있고, 또한 거기에 맛이 더해져서 우리나라에서 음식 하면 호남을 꼽게 된다.
  수확량이 많은 곡식은 말할 것도 없고, 각종 양념류 및 다양한 해산물은 호남지역의 식탁문화를 풍성하게 해온 가장 중요한 요인이다. 천혜의 자연적 조건이 가져다준 선물이며, 그러한 선물을 잘 활용한 전라도 사람들의 창의적 기질이 함께 이루어진 중요한 문화적 유산인 셈이다.
  서울을 비롯해서 전국 어디를 가든 광주에서 왔다고 하면 음식 맛이 최고라는 찬사가 인사말로 건네지고 있다. 외지사람들이 호남에 오면 식탁에서 행복하지만, 반대로 호남사람들이 외지에 나가면 식탁에서 불행해진다. 질적 차이가 워낙 크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풍부한 식품재는 질 높은 식문화로 성장했으며, 이러한 결과는 지역문화의 유전인자가 되어 현재까지 전해지게 된 것이다.

  의향, 예향, 미향은 각각 그 성격과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여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이 모두 호남을 토대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들을 관통할 수 있는 배경적 요인이 찾아져야 한다. 이와 같은 3가지의 문화적 표상의 형성배경으로 다른 지역에 비해 풍부한 물적 토대가 뒷받침되었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풍부한 물산 덕택에 그것을 지켜내려는 집단적 심성이 결집되어 의향이 되었다. 또 넉넉한 살림은 풍류를 즐기면서 자연히 예술에 대한 감수성이 풍부해지고 이것은 결국 예향이 되는 근거가 되었다. 또한 넉넉한 삶을 살았던 호남지역의 음식문화는 다른 지역에 비해 수준이 높았기 때문에 이를 일러 미향이라 하게 되었다.

  의향, 예향, 미향을 형성, 배태시켰던 근원을 넉넉한 살림살이라 했지만, 이러한 환경은 농업사회를 기반으로 하는 것이었다. 공업사회로 진입한 이후, 호남지역은 전국에서도 가장 낙후된 지역으로 전락하고 만다. 의향, 예향, 미향이라는 문화적 표상이 아직은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지만, 언제까지 그것이 계속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배경과 전경은 상호성을 지닌다. 넉넉한 살림살이가 의향, 예향, 미향이라는 전경을 낳았다면, 그 반대의 짜임도 점쳐볼 수 있다. 즉 의향, 예향, 미향이 배경이 되어 넉넉함이라는 전경을 낳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소위 문화의 시대는 이러한 기대를 가능하게 한다. 적어도 우리는 공간자원에서 시간자원으로의 대전환이 이루어지고 있는 이 시대를 맞이하여, 그간 전통문화 속에 간직해 왔던 3향이라는 문화적 표상을 개발의 근간으로 삼아 새로운 문화시대에 알찬 미래 건설의 자양으로 거듭나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나경수
나경수 전남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는 전남대학교 박물관장,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 한국민속학회장, 국어교과교육학회장 등을 역임했으며, ‘고전시가와 문화콘텐츠’ 등 연구논문과 ‘호남의 문화예술과 민속’ 등 다수의 저서를 집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