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중순 점심시간에 맞춰 도착한 서울 세종문화회관 주변은 수많은 인파로 활기가 넘쳤다. 특히 한낮의 봄볕이 내리쬐는 식당과 레스토랑, 카페 등에는 정장차림의 직장인들로 북적거렸다. 정오의 음악회가 열리는 세종예술아카데미로 올라가는 계단입구엔 형형색색의 파라솔 아래 옹기종기 모여 느긋하게 브런치를 즐기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강의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자동차 경적소리와 공사장 소음으로 범벅인 인근 광화문 광장과 달리 공연장은 아름답고 은은한 클래식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같은 시간인데도 강의실 안과 바깥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100석 규모의 작고 아담한 공연장에는 피아니스트 김주영 씨와 바이올리니스트 우정은, 첼리스트 박혜준 씨가 러시아 작곡가 쇼스타코비치의 ‘피아노 트리오 2번’을 연주하고 있었다. 객석을 차지한 40여 명의 관객은 서정적이면서도 엄숙한 선율에 매료돼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이날 피아노 연주와 사회를 맡은 김주영 씨의 귀에 쏙쏙 들어오는 해설은 또 다른 즐거움이었다. 객석에는 말끔한 양복차림의 20∼30대 회사원이 절반이 넘었지만 40∼50대 중년 여성들과 맨 뒤쪽에 앉아 누구보다도 음악에 심취한 듯한 70대 어르신들도 보였다.
1시간의 음악회가 끝나자 직장인들은 주최 측에서 준비한 샌드위치와 커피를 들고 잰 걸음으로 공연장을 빠져 나갔다. 반면 시간적 여유가 있는 중년 여성들과 어르신들은 강의실 밖 간이 테이블에 모여 샌드위치와 커피로 점심을 때우며 강의 뒷얘기로 수다를 떨며 오붓한 한나절을 보냈다.
세종예술아카데미-원형 강의실에서 강의듣는 수강생들
문득 3년 전 취재차 방문했던 모스크바 볼쇼이 극장 풍경이 스쳐 지나갔다. 발레의 나라로 유명한 러시아는 매일 수십 여개의 극장에서 발레 공연이 무대에 오르지만 예약 하지 않으면 티켓을 구하지 못할 정도다.
모스크바 사람들의 겨울은 발레관람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겨울이 빨리 찾아오고 밤이 긴 지리적 여건상 ‘모스크비치(모스크바시민)’들은 밤 시간을 보내기 위해 공연장을 찾아다니는 것이 일상화됐다. 말하자면 이들에게 있어 공연관람은, 일종의 겨울나기인 셈이다.
그래서인지 여름 휴가철을 빼면 모스크바는 늘 문화관객들로 붐빈다. 연극과 발레, 오페라를 공연하는 93개의 크고 작은 극장에선 매년 수백여 편의 작품이 무대에 오른다. 도심의 볼쇼이 극장은 성장(盛粧)한 노부부에서부터 발랄한 차림의 20대 대학생에 이르기까지 관객들로 넘쳐난다. 객석의 펑퍼짐한 중년 여성들은 발레 ‘지젤’의 줄거리를 줄줄 외울 정도다. 추운 겨울동안 발레, 뮤지컬, 전시장 등을 찾아다니다 보면 따뜻한 봄을 맞게 되는 곳이 바로 모스크바다.
이들에게 있어 문화향유는 특별한 의식이 아닌, 말 그대로 ‘삶의 방식’(the way of life)이다. 모스크바 시민들이 ‘뉴요커(NewYoker)’나 ‘런더너(Londonerㆍ런던시민)’들에 결코 기죽지 않고 ‘문화시민’임을 자부하는 힘도 바로 이런 저변에서 나온다.
이 같은 러시아 사람들의 예술사랑은 ‘문화’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뜨린다. 흔히 문화생활은 특별한 사람들의 전유물로 여기는 분위기가 일반적이다. 당장 먹고 살기 바쁜데 한가하게 전시장이나 공연장을 둘러 볼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다. 하지만 잘 알다시피 러시아가 경제적으로 넉넉치 않은 나라임을 생각하면, 소득수준이 문화생활을 좌우한다고 보기에는 설득력이 약하다. 문화향유에 대한 욕구는 곧 마음의 여유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일본 가나자와 시민예술촌
그렇다면, 아시아의 문화수도를 지향하는 광주시민들의 일상은 어떠한가? 유감스럽게도 그리 ‘문화적’이지 않다. 지난 2013년 한국 레저 산업연구소가 지역별 1인당 문화오락비를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광주와 전남은 17개 시ㆍ군에서 하위권에 머물렀다. 문화오락비는 전시 및 공연관람, 신문, 서적구입 등에 지출한 금액으로, 한 지역의 문화수준을 나타내는 주요 척도 가운데 하나다.
이 때문에 문화 수도 광주의 예술 활동 지수 역시 전국 17개 도시 가운데 7위, 전남은 10위를 기록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문학ㆍ시각예술ㆍ국악ㆍ양악ㆍ연극ㆍ무용 등 6개 예술분야의 지수를 각각 100으로 잡고 문화 활동이 집중된 서울(600점)을 기준으로 예술 활동 지수를 환산한 결과, 광주는 6개 부분 종합지수가 47.1로 경기(149.2), 부산 (106.4), 대구(63.7), 경남(60.4), 전북 (52.7)보다 낮게 나타난 것. 수요가 공급을 창출한다고 볼 때 저조한 문화소비가 예술가들의 창작활동을 위축시킨 셈이다.
이렇듯 시민들의 문화향유는 곧 예술가의 창작과 도시의 역량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근래 세종문화예술회관, 대구 오페라 하우스, 일본 가나자와 시민예술촌 등 국내외 문화예술기관들이 시민들의 문화마인드를 끌어 올리는 다양한 아카데미와 교육 프로그램에 주력하고 있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사실 아시아문화중심도시 조성사업이 본격화되면서 지역문화계는 일 년 내내 시민들의 문화지수를 높이는 강좌나 행사가 끊이지 않는다. 문화에 대한 안목을 키워주는 강좌에서부터 축제,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의 브런치 콘서트까지 주제나 성격도 각양각색이다. 많을 때는 하루에만 3∼4개의 프로그램이 열릴 정도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상당수의 행사가 ‘그들만의 잔치’로 치러진다. 문화수도를 지향하고 있지만 정작 많은 시민들은 ‘문화’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나마 소수의 적극적인 애호가들이 프로그램에 참가해 문화광주의 자존심을 지켜가고 있는 실정이다.
문화는 경험한 만큼 알게 되고, 아는 만큼 즐긴다고 한다. 문화시민이 되는 첫걸음은 평소 다양한 ‘경험의 장’(場)을 찾는 것이다. “문화에 대한 관심과 참여는 평생학습의 근간이다.” 오늘부터라도 짬을 내 가족이나 지인들과 함께 전시장이나 공연장으로 떠나자. 분명 예술적 감동 못지않게 잊고 지냈던 일상의 여유를 되찾게 될 것이다.
- 박진현
- 박진현 광주일보 편집부국장 ․ 문화선임기자는 27년간 문화전문기자로 활동하며, 광주전남의 문화 이슈를 다룬 칼럼 ‘박진현의 문화 카페’를 10년간 연재하여 지역문화지형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화시킨 공로를 인정받아 제33회 최은희여기자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