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평생교육진흥원에서는 매달 마지막 수요일을 '문화가 있는 날'로 지정하였습니다. 문화체험, 하이킹, 광주천 가꾸기 활동 등 다채로운 활동을 통해 직원 간 친목을 다지고 지역사회와 함께 하는 의미 있는 시간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번 5월 문화가 있는 날은 5·18 민주화운동 40주년을 기념하여 망월동 국립 5·18 민주묘지와 5·18자유공원을 방문해 그 의미를 되새기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5·18자유공원은 1980년 5·18 민주화운동 당시 정권찬탈을 기도하던 일부 정치군인들의 강경진압에 맞서 우리나라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싸우신 분들이 구금되어 군사재판을 받던 곳입니다. 원래의 위치에서 100m정도 떨어진 곳에 원형으로 복원·재현 되었습니다. 이곳 5·18자유공원에서는 5월 11일부터 6월 17일까지 5·18 민주화운동 40주년을 맞이하여 '5·18 그날의 진실을 기억하라' 특별전이 개최되었습니다. 이번 특별전은 5·18민주화운동 유공자들이 생생하게 들려주는 도슨트 운영, 홍성담 화백의 판화, 당시 수감생활과 재판 현장을 느낄 수 있게 스마트폰을 활용한 증강현실(AR)체험 등 다양한 체험이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문화해설사의 안내를 따라 5·18자유공원 견학을 시작했습니다. 먼저 영상·전시실이 있는 자유관에서 영상을 시청하고 전시실로 이동해 1980년대 전후의 역사적 사건들을 살펴보았습니다.
5·18 민주화운동은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 새벽까지 열흘 동안 전두환을 정점으로 한 당시 신군부 세력의 진압에 맞서 광주시민과 전남도민이 '비상계엄 철폐', '유신세력 척결' 등을 외치며 죽음을 무릅쓰고 민주주의 쟁취를 위해 항거한 역사적 사건입니다. 항쟁 기간 중 22~26일 닷새 동안은 시민들의 자력으로 계엄군을 물리치고 광주를 해방구로 만들어 세계사에서 그 유래가 드문 자치공동체를 실현하기도 했습니다. 5·18민주화운동은 이후 한국 사회에서 지속적으로 전개된 민주화운동의 원동력이 되었고, 군부독재에 결정적 타격을 가한 87년 6월 항쟁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6월 항쟁에 이르기까지, 광주를 비롯한 전 국민이 보인 저항과 참여, 연대의식은 오늘날 세계 곳곳에 중요한 민주화운동 사례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광주시민은 하나로 뭉쳐 더욱 힘을 내어 싸웁시다”
자유관 전시실에서 나와 헌병대 중대 내무반- 헌병대 본부 사무실- 헌병대 식당- 영창- 법정을 따라가며 그 때의 상황을 생생하게 느끼고자 했습니다.
헌병대 중대 내무반은 헌병들이 일상생활을 하고 잠을 자는 휴식공간이었는데, 1980년 당시 임시로 합동수사반의 심문실과 고문실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수사관들은 자신이 원하는 대답이 나올 때까지 구타를 가했으며, 중대 내무반은 헌병들의 휴식 공간이 아니라 시민들을 때려잡는 인간 도살장이었습니다.
계엄사령부 합동수사 본부였던 헌병대 본부 사무실은 시내에서 계엄군에 끌려온 시민들을 조사했던 곳입니다. 수사관들은 진압봉으로 무자비하게 시민들을 구타했고, 굵은 곡괭이자루, 송곳 등으로 손톱을 찔러대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바로 옆방에서 고문당하는 사람들이 지르는 신음과 비명을 들은 시민들은 구타를 피하기 위해 허위자백을 하기도 했습니다.
원래 헌병대 식당이었으나 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 등 연행자들에 대한 고문과 조사를 받는 임시 취조실로 사용되었습니다. 수사관들은 잡혀온 시민들에게 매일같이 자술서와 진술서를 쓰게 했으며, 이 과정에서 조금이라도 틀리면 온몸에 피범벅이 되도록 구타를 가했습니다.
이곳 헌병대 식당에서는 5·18 민주화운동 당시 주먹밥을 만들어 나누던 나눔과 연대의 공동체 의식을 재현하고자, ‘오월 나눔의 주먹밥 만들기 체험학습’이 진행되기도 합니다.
당시 상무대 영창이라고 불렸던 영창은 일부 정치군인들의 정권찬탈에 맞서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분들이 구금되었던 곳입니다. 강제 연행된 시민들은 폭도라는 누명을 쓰게 되었고,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의 온갖 고문에 몸과 마음이 극도로 상했을 것입니다.
수감기간 동안 한 방에는 많게는 150명씩 수감되거나, 영창 내 독거실에 10여명 씩 수감되었습니다. 구금된 시민들은 하루 16시간의 정좌자세로 수감생활을 하고 가혹한 구타와 감시로 인권을 유린당했습니다. 붙잡힌 시민들은 민간인이었지만, 범죄를 저지른 군인과 동일하게 대우받았고 이유없이 헌병들에게 구타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진실은 반드시 승리한다는 믿음으로 서로 굳게 뭉쳐 극복해 나갔으며 1980년 10월 27일 광주교도소로 이감될 때 까지 구금되어 있었습니다.
1980년 당시 군사재판은 5·18 민주화운동의 진상이 외부에 알려지는 것을 막기 위해, 상무대 안에 급히 법정을 세웠습니다. 법정 안에는 무장한 헌병 군인들이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 가운데 비공개 약식재판이 진행되었습니다.
구속자들은 재판 과정에서 부당한 군사재판에 대한 항의 표시로 소리높여 애국가를 부르며 민주화 운동의 정당성을 주장했지만. 군사재판부는 짜여진 각본에 따라 시민들에게 실형을 선고했습니다.
5·18자유공원의 법정 내부에는 음성 더빙 및 스크린 자막이 제공되어 더욱 생생하게 당시 재판현장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5·18 민주화운동은 독재정권에 맞서 싸우고 있는 아시아 여러 나라의 민중에게 귀중한 경험을 제공해주고 있으며, 동시에 민주화운동이 지향해야 할 정신적인 지표로도 작용하고 있습니다. 또한 전 세계인들에게는 위대하고 아름다운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한국 민주주의의 밑거름 역할을 했다는 면에서 광주와 대한민국의 민중은 5·18 정신을 가슴 깊이 새기고 있으며, 그 정신을 민주·인권·평화·통일 등 새로운 시대에 새롭게 제기된 과제로까지 확장시켜나가고 있습니다.
누군가의 가족이었고 이웃이었습니다.
평범한 시민이었고 학생이었습니다.
그들은 인권과 자유를 억압받지 않는,
평범한 일상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 5·18민주화운동 37주년 기념사 中-
- 박세윤
- 광주평생교육진흥원 기획조정실 행정인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