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평생교육史 광주학생독립운동 90주년,역사를 바꾼 건 항상 청년학생이었다. 임채석 |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회관 선양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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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바꾼 건 항상 청년학생이었다'

1929년 11․3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올해로 90주년을 맞는다. 학생독립운동이 발발하기 10년 전인 1919년이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지 100주년이 되는 셈이다. 1919년과 1929년은 일제강점기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 커다란 변혁을 가져온 역사적 큰 물결이었다. 11․3 광주학생독립운동은 민족적 차별교육과 식민지교육에 반대하며 학생들이 벌였던 항일독립운동이다. 학생독립운동은 규모나 역사적인 의미에서 ‘1919년 3․1운동’, ‘1926년 6․10만세운동’과 함께 일제 강점기하에서 3대 항일독립운동으로 평가받고 있다.

90년 전, 나주에서 발발되어 광주에서 시작된 학생독립운동은 청년항일투쟁사에 특기할만한 사건이었다. 1929년 10월 30일, 전남 나주에서 일본인 학생이 한인 여학생을 희롱하면서 발생한 한․일 학생간의 충돌에서 시작됐다. 그러나 일본 경찰의 일방적인 한인 학생 탄압을 계기로 민족감정으로 번졌고, 11월 3일 광주에서 광주고보(현, 광주제일고)와 광주농업고(현, 자연과학고)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학생시위운동으로 확대되고 전국적인 항일독립만세운동으로 발전했다.

나주역 사건 주인공(박준채)
나주역 사건 주인공(이광춘, 박기옥)

이렇게 시작된 학생시위는 며칠 사이에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대전, 전주, 정읍, 대구, 부산 등 3남 지방에 이어 서울을 거쳐 이북으로까지 불길처럼 번졌다. 그해 12월에 경성과 평양, 함경도 등 국내지역과 만주와 연해주 등 320여개 학교의 학생들이 참여한 학생독립운동은 3․1운동 이후 최대 항일독립운동으로 한국 독립운동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의미를 담고 있다.

최근 학생독립운동에 대한 전문가 연구에서도 미주․남미까지 그 영향을 미쳤다는 학술적 증거들이 속속들이 발표되고, 1929년 당시 세계적 관심과 지지를 보도한 자료들이 확인되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1920년대 항일민족운동을 대표하는 광주학생독립운동은 학생운동 차원에 머물지 않고 전 민족적 운동으로 발전해 나갔던 것이다. 전국의 320여개 학교와 5만 4,000여명의 학생이 참가한 학생독립운동은 당시 전체 학생의 절반이 넘는 숫자였으며, 1,600여명 구속, 2,900여명 퇴학 및 무기정학 처분을 받았으며, 광주에서만 260여명의 학생들이 구속 수감되었던 전국적 규모의 항일독립운동이었다. 그 중 북한지역에서도 128여개 학교가 참여하여 전체 학생독립운동의 40% 비중을 차지할 정도로 대대적인 학생들의 참여가 있었다.

1953년 정부는 광주학생독립운동 기념일인 11월 3일을 ‘학생의 날’로 지정했다. 그리고 1973년 ‘학생의 날 폐지’와 1985년 ‘학생의 날 재지정’, 등 ‘학생의 날’은 정권에 따라 기복을 겪었다. 2006년 ‘학생의 날’을 ‘학생독립운동기념일’로 명칭이 변경되어 학생독립운동기념식을 광주시교육청이 주관하여 기념행사를 치러오다가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시행 2018.11.2.)이 개정됨에 따라 학생독립운동기념일 주관부처를 교육부에서 국가보훈처와 교육부의 공동주관으로 변경했다. 지난 2018년부터 정부행사로 격상된 학생독립운동기념식 행사는 국가보훈처가, 계기교육과 부대행사는 교육부가 업무를 분담하여 명실 공히 정부가 주관하는 첫 기념식행사를 성대하게 치렀다.

과거정부는 학생독립운동이 광주에서 일어났다는 이유로 정부의 관심밖에 머물러 있었다. 학생독립운동이 한․일 학생들 사이에 일어나 우발적이고 지역적 사건으로 국한되면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는 학생독립운동을 정당하게 평가하고 위상에 걸맞게 정부주관 행사로 격상했다. 제2의 3․1운동이었던 학생독립운동은 그 중심에 학생들의 자발적인 참여가 있었다. 사실 광주학생들은 그 3년 전부터 비밀결사조직 ‘성진회’를 중심으로 항일투쟁을 준비했다. 성진회는 ‘독서회’로 확대 개편해 11월 3일 항일시위를 주도했다. 그리고 조선청년동맹, 신간회, 근우회 같은 민족단체들과 결합해 전국적 항일투쟁으로 발전시켰다. 이제부터라도 학생독립운동이 항일투쟁의 맥락에서 올바르고 정당하게 평가되고 연구되어야 한다.

성진회 결성사진(왕재일 외 14명)
제89주년 첫 정부행사 격상(국무총리 참배)

역사를 바꾼 건 항상 청년학생이었다. 학생들은 역사의 위기마다 늘 새 시대를 여는 주역이었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은 그 10년 전인 1919년 3․1독립만세운동 이후 냉각되었던 항일운동을 되살렸다. 그 정신이 해방 이후 이승만 정권 때는 1960년 대구 2․28 학생시위, 마산 3․15 학생시위, 서울을 비롯한 전국의 4․19혁명으로 불타올랐다. 군부의 정치적 야욕에 맞선 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87년 6․10 민주항쟁으로 계승됐다. 그리고 촛불혁명으로 부활했다. 오늘의 대한민국의 독립과 민주화는 학생들의 희생과 투쟁의 역사적 산물이다.

11․3 학생독립운동기념일은 정의와 진실을 위해 싸워온 선배 청년학생들의 정신을 기리는 날이자 자유와 평등, 인권과 정의를 사랑하는 우리 학생들을 위하는 날이다. 광주학생독립운동 90주년, 우리는 이 날을 결코 잊지 않고 선배선열 학생들의 숭고한 민족 자주독립정신을 영원히 기억하고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역사란 과거의 기억이기도 하지만 오늘을 볼 수 있는 거울이기 때문이다.

임채석
임채석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회관 선양과장
Chosun University Graduate School of Education “A Study on the Methodes for Improving the Operation System of Secondary Private School”의 논문으로 2003년 2월 교육학 석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최근 공공행정논총(초․중․고 무상급식 운영 실태분석; 광주시교육청 사례, 2019, 제31집 99-124) 공동저자 등재, 현재 광주광역시교육청 산하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회관 선양과장으로 재직하고 있으며, 전남대학교 일반대학원 행정학과 박사과정 중에 있다. 관심영역은 정부예산론, 지방재정론, 교육복지, 누리과정 예산 결정요인에 관한 연구이다(idea3307@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