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평생교육史 젊음을 깨운 50년! 세상을 밝힐 100년!광주흥사단의 교육 문화 활동 송한용 광주흥사단 상임대표 | 전남대학교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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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사단의 창립과 변천

2013년 5월 창립 100주년을 맞은 흥사단은 1913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도산 안창호 선생이 중심이 되어 8도 대표를 발기인으로 하여 창립됐다. 한국인에 의한 자생적 민족운동단체로 한 세기의 역사를 이어온 민간조직은 흥사단이 유일하다. 지난 100년은 우리 민족사를 통틀어 가장 극심한 수난과 격변의 시기였다. 국권상실, 독립을 위한 저항과 투쟁, 해방과 분단, 정부수립과 동족상잔, 그리고 고도성장과 민주화투쟁으로 점철된 역사 중심에 흥사단이 있었다.



흥사단의 이념과 목적은 1907년 조직된 신민회와 1909년 조직된 청년학우회를 계승했다. 신민회와 청년학우회의 공통점은 도덕성과 애국심을 갖춘 인재를 양성하고 조직화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는 점이다. 도산은 독립협회, 공립협회, 신민회, 대성학교 등의 다양한 사업을 추진하고, 많은 민족지도자들과 함께 민족운동을 도모하는 과정에서 인격적 기초의 중요성과 국민적 소양을 갖춘 인재의 단결이 무엇보다 필요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여기서 도산이 요구하는 인격이란, 서로에게 믿음을 줄 수 있는 정직성을 갖추고 아울러 자신의 생존에 필요한 생산기술이나 전문지식을 갖춘 인격을 의미한다. 이런 인물들을 훈련하고 조직화하여야 비로소 실질적인 독립운동도 가능하고 장기적으로 부강한 국가를 건설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망명지 미국에서 교민자치와 독립운동을 위한 대한인국민회와 별도로 민족운동에 헌신할 인재의 양성과 훈련을 위한 단체로서 흥사단을 창립한 것이다.

민족의 독립과 독립된 조국의 번영을 위해 노력한 흥사단은 해방 이후 한국전쟁 시기 커다란 손실을 입었고, 이승만 정권 하에서 깊은 침체기를 맞게 되었다. 전쟁 와중에도 흥사단은 변함없이 본연의 수련활동과 문화사업 및 사회교육운동을 지속했다. 특히 1954년 4월부터 시작된 ‘금요강좌’는 이후 1,400회를 이어오면서 시민교육의 장이 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승만정권의 독재에 대한 비판의 장으로 작용했다. 흥사단이 발행하던 월간 잡지 「새벽」은 「사상계」와 더불어 한국 지성인의 대변지로서의 역할을 했다. 당시 흥사단은 정치단체 이외에는 거의 유일한 비판세력이었고 시민교육을 담당했다.

1963년은 흥사단이 창립 50주년을 맞이했고, 5·16으로 중단되었던 사회단체 활동이 재개되는 해였다. 그동안 초창기와 일제강점기 미국과 상해 혹은 국내에서 입단했던 단우들은 대부분 고령화되어 젊은 층의 영입이 절실히 필요했다. 그리하여 청년 학생을 대상으로 ‘아카데미’라는 새로운 조직을 만들었다. ‘아카데미’는 흥사단의 영문 표기를 ‘Young Korean Academy’라고 한데서 기인하지만, 1963년 이후에는 특히 학생조직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아카데미’의 창설을 후속세대를 양성하는 의미 이외에 교육운동 차원에서 흥사단이 학생 및 청년문화에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광주흥사단 창립과 광주학생 아카데미

아카데미의 전신은 1956년 4월에 창립된 서울지역 ‘학생회’이다. ‘학생회’는 흥사단의 지도를 받고 활동을 하고 있는 청년부 재학생모임이었다. 1957년 6월, 대학생, 청년부와 별도로 ‘고등학생 학생회’가 독립하여 매월 마지막 일요일에 정기집회를 가졌으며, 초기에는 주로 야외에서 강론과 토론, 좌담, 희락회 등을 열고 회지 「기러기」도 발간했다. 이를 기반으로 1963년 9월 서울지역에서 청년아카데미, 대학생서울아카데미, 고등학생서울아카데미가 창립되고, 이듬해부터 주요도시에서 아카데미가 창립되기 시작했다.

흥사단인물 박준선생

광주에서는 1965년 10월 17일 광주일고 강당에서 17명의 회원으로 ‘흥사단 광주학생 아카데미’가 출범했다. 20대의 청년 소민 박준 선생이 흥사단의 이념에 공감하여 입단한 후 광주·전남지역에서 흥사단운동의 기수가 되었다. 국어교사이면서 태권도를 가르쳤던 박준 선생은 그에게서 태권도를 배운 후배들과 지인들을 중심으로 흥사단 조직을 만들어갔다. 박준 선생이 도산사상과 흥사단을 접하게 된 것은 군 복무 때 선임병이었던 오정수 단우(전 제주 문화방송 사장)를 만난 덕분이었다. 군 제대 후 1964년부터 2년여 간 흥사단을 찾아가 안내를 받으며 단서적을 탐독하고 공명하여 마침내 흥사단에 입단하였다. 그러나 지역사회 안의 기반이 전혀 없는 그로서는 광주에 흥사단을 전파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결국 대학교 친구들과 태권도를 배우고 있는 문하생, 지인의 후배 등을 소개받아 1965년 9월 19일 전남대 농대 밀알회관에서 16명이 모여 ‘광주흥사단’의 뿌리가 된 ‘서석기러기회’를 조직하였다. 흥사단 이념을 더욱 확대하기 위하여 서석기러기회를 기반으로 ‘아카데미’를 창립하기로 하여 그해 10월 광주학생 아카데미가 탄생했다. 흥사단 식의 인물기르기 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1969년 전국에서 7번째로 성인조직인 흥사단 광주분회가 설립됐다. 광주분회가 결성되어 움직인 1960년대 말과 1970년대는 박정희정권이 3선 개헌에 이어 유신체제를 선포하고 독재 권력의 모습을 노골화한 시기였다. 이념서클인 고등학교 아카데미와 대학교 아카데미는 활동에 여러 제약을 받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민주주의와 민족주의 의식이 강한 젊은이들을 끌어들이는 강한 흡인력을 가졌다. 여기에 도산사상의 전도사를 자처한 안병욱 교수가 광주 시내 고등학교를 순회 강연하면서 도산사상을 소개하고 젊은이들의 꿈과 비전을 일깨우면서 흥사단 아카데미의 위상이 높아졌다. 학생조직으로서 아카데미는 숫자가 늘어남에 따라 고등학교 연합회와 대학교연합회로 분리되었고, 각 연합회 산하에는 단위 아카데미가 설립됐다. 1969년 12월 전남대, 조선대, 광주교대 아카데미가 창립되었고, 이듬해 3월에는 3개 대학 아카데미를 묶는 대학 아카데미 연합회가 공식 발족하였다. 고등학교 아카데미 연합회 산하에는 광주일고, 광주고, 살레시오고, 광주상고, 전남고, 장흥고, 전남여고, 중앙여고 아카데미 등이 있었다.

흥사단창립 대한민국 임시정부 시절 도산

1971년 11월 3일 학생의 날을 기하여 광주분회의 하부조직으로 흥전아(흥사단전남학생아카데미)로 불리는 ‘흥사단 학생아카데미 전라남도 연맹(도연맹)’을 창립했다. 광주는 물론 목포, 순천, 여수, 장흥, 해남 등 전남지역 곳곳의 흥사단학생아카데미 운동을 효율적으로 지원하기 위해서였다. 1970년대에 광주·전남 흥사단아카데미는 전성기라 할 정도로 크게 팽창했으며, 1980년대에도 아카데미 조직이 확대되었다. 순천대, 목포대 아카데미가 창립되었다. 고등학생 아카데미로는 석산고, 송원고, 숭일고, 동신고, 대동고, 송원여고, 경신여고, 수피아여고, 동신여고, 조대여고, 해남고, 해남여고, 장흥여고, 목포제일여고, 영광해룡고 아카데미가, 여수 연합회에서는 여수고, 여수여고, 여수중앙여고 아카데미가 창립됐다.



하지만 1970년대 중반 이후 급격하게 확대되던 아카데미 운동은 시련을 맞기 시작했다. 1970년대 초중반부터 대학생 아카데미는 전반적으로 민주화운동을 지향하는 대학동아리로 변화했다. 아카데미 회원들은 한국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이해하는 정치경제학 및 역사 등을 통해 실천적 지식인으로서 아카데미운동을 설정했다. 그러나 박정희 유신체제는 대학동아리 활동을 크게 제약하였다. 각 대학에는 상담지도관실이 설치되어 학생들의 활동을 감시했다. 써클 등록 시 반드시 지도교수를 두도록 하였는데 아카데미는 지도교수 찾기가 어려웠다. 다행히 전남대에는 김용선 교수가 조선대에서는 최용섭 교수가 지도교수를 맡아주어 큰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반면 광주교대 아카데미는 지도교수를 모시지 못해 등록을 하지 못하고 비공식 활동을 했다. 후일 광주교대 아카데미가 해산되는 가장 주요한 배경이었다.

박정희 정권의 몰락과 5·18광주민중항쟁을 거쳐 탄생한 전두환 정권 시기에 아카데미운동은 지역적 그리고 학교별로 확대되면서도 역량이 크게 약화되는 역설적 쇠퇴기를 맞게 된다. 쇠퇴는 먼저 대학생 아카데미에서 시작되었다. 5·18광주민중항쟁 이후 대학의 이념써클들은 70년대와는 달리 이념은 급진화하고 운동성이 훨씬 강화되면서 아카데미의 입지가 크게 위축되었다. 9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이념써클은 거의 자취를 감추었고 아카데미도 전남대와 조선대만 겨우 명맥을 유지하는 수준으로 쇠락하게 되었다. 90년대 말에 들어 인물기르기의 방향을 학생아카데미에서 일반청년으로 전환하면서 청년아카데미가 창립되었지만 장기적으로 지속되지 못하였다.

고등학교 아카데미는 대학과는 다른 이유로 어려움을 겪었다. 입시경쟁이 치열해지고 야간자율학습이 강제되면서 학생들이 주말 이외에는 회관출입이 거의 불가능하게 되었다. 학부모들도 입시에서 벗어난 교외활동에 우호적이지 않았다. 아카데미의 학생 숫자가 줄어든 것뿐만 아니라 흥사단과의 관계도 형식적 수준에 머물게 되었다. 학생들은 흥사단아카데미를 여느 동아리와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학교생활의 한 방편으로 생각할 뿐 흥사단이념으로 교육받는 것에는 그다지 흥미가 없었다. 결국 흥사단의 아카데미를 통한 교육운동은 크게 위축되었다.

2000년대 들어서서도 아카데미를 통한 교육운동은 쉽게 예전의 모습을 찾아가지 못하고 있다. 대학생의 경우 조선대와 전남대가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수준이다. 이외의 대학은 2006년 동강대 아카데미가 발족하여 한동안 유지되다가 해체되었고, 호남대, 광주대 등의 몇몇 학생들이 흥사단을 찾았지만 조직화로 나아가지 못하였다. 가장 주요한 원인으로 이념지향 혹은 지역과 민족문제 등 공동체에 대하여 관심이 없는 사회적 분위기 그리고 취업이라는 현실적 문제를 꼽을 수 있다. 고등학교의 경우도 형식적 숫자는 여전히 유지되고 있지만 공동체나 사회 중심의 건전한 시민교육에 대하여 그다지 흥미를 여전히 갖지 않고 있다. 하지만 광주흥사단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방학기간에 수련회를 갖고 있으며, 수시로 회관에서 간부 및 전체 학생들을 위한 다양한 교육을 하고 있다. 특히 민주피아교육, 토론(디베이트)교육 등은 전문가를 초빙하여 교육하고 있다. 대학생들의 경우 지도자 양성 프로그램을 시행하여 토론지도자 자격을 부여하고, 일반 고등학교에서 봉사활동을 함으로써 매우 긍정적인 반응을 얻고 있다.

수탁기관 운영과 교육‧문화 활동

1990년대 중반 이후부터 광주흥사단은 아카데미 운동을 통한 풍부한 경험 및 인적 인프라를 기반으로 청소년 관련 기관을 수탁 받아 운영하면서 흥사단 내부뿐만 아니라 대외적으로 청소년 교육운동에 적극 나서기 시작했다. 1993년부터 운영하였던 청소년연구원의 실적을 인정받아 1996년 2월 광주광역시로부터 광주광역시청소년자원봉사센터 위탁 운영단체로 결정되었고, 3월 16일 ‘광주광역시청소년자원봉사센터’를 개소했다. 주요 사업으로는 자원봉사 지도자 모집, 자원봉사 활동 진행, 봉사활동 지도방법과 실행활동 등에 대한 교육을 실시하고, 아울러 청소년들에게 다양한 자원봉사활동에 대한 정보제공, 자원봉사활동 프로그램 연구 및 개발, 자원봉사자 지도 등의 업무를 담당했다.

2000년대에 들어서 광주흥사단은 청소년연구원의 운영경험을 살려 청소년자원봉사센터 이외의 프로그램 수탁운영에 적극 나섰다. 2008년 11월 광주광역시가 옛 안기부 터에 있던 건물을 리모델링해서 청소년 시설로 지정, 위·수탁 공모에 참여하여 수탁했다. 청소년문화의집은 청소년의 문화예술 및 취미활동을 위한 공간 제공, 청소년의 정서지도와 사회교육 및 심신수련, 청소년 문화예술 체험활동 기회를 제공하고, 청소년문제의 상담지도 및 여가를 선용하며, 지역주민의 문화복지를 위한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 주요사업으로 ‘청소년퓨전마당극단 나르샤’, ‘청소년희망프로젝트’, ‘청소년운영위원회「무리수(秀)」’, ‘하루체험 Art&Job’, ‘청소년동아리지원’, ‘문화예술대안학교 래미학교’, ‘청소년방과후아카데미’ 등을 운영하고 있다. 그 외에도 ‘청소년어울림마당’, ‘보헤미안여행학교’, ‘해피스토리유랑단’ 등의 프로그램을 운영하면서 광주광역시 청소년문화교육운동을 선도하고 있다.

이에 앞서 2004년 3월 광주광역시 서구청과 농성문화의집을 위·수탁하여 운영하고 있다. 문화의집은 1996년 문화복지라는 명제 하에 이루어진 문화관광부의 첫 번째 사업이었다. 농성문화의집은 지역사회에서 문화복지 뿐만 아니라 평생교육의 장으로서 역할을 하고 있다. 광주흥사단은 흥사단이념을 바탕으로 삼아 지역주민의 일상 생활 속에서 다양한 체험프로그램과 문화정보 서비스를 제공하여 생활 속 문화체험공간으로 꾸며가고 있다. 주로 소규모 공연 및 전시공간 제공, 각종 문화예술행사 개최, 음악 빛 영화 감상, 취미생활공간 제공, 여가선용을 위한 장소 제공, 지역 향토문화예술 소개 및 보급, 창작활동 프로그램 등 일반시민의 여가와 평생교육의 장으로서 운영하고 있다.

광주에는 2011년 전국 최초로 ‘광주광역시 학교 밖 청소년의 보호 및 교육지원조례’가 제정되었다. 하지만 예산상의 이유로 ‘학교밖청소년지원센터’ 설치는 1년이 훨씬 지난 2012년 9월에 가서야 센터가 개소하게 됐다. 광주흥사단은 청소년문화의집을 통한 대안학교 래미학교를 운영하고 있던 경험을 살려 학교밖청소년지원센터를 맡게 되었다. 센터는 직접 대안학교를 운영하기보다는 각 대안학교를 지원하고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모든 대안학교의 허브역할을 하는 곳이다. 개소 이후 지금까지 전국에서 가장 모범적 운영되고 벤치마킹의 대상이 되고 있다. 광주흥사단이 자긍심을 갖는 곳으로 아카데미를 통한 청소년교육운동의 노하우가 집약적으로 표출되는 곳이다.



1996년 시작했던 광주광역시 청소년자원봉사센터는 2006년 7월 청소년에 대한 종합적인 서비스망의 필요에 따라 청소년활동진흥법 제7조와 제9조에 따라 ‘광주광역시청소년활동진흥센터’로 확대·개편되었다. 센터는 봉사활동을 넘어 지역사회의 청소년활동 홍보와 정보제공, 청소년국가정책사업 전달매개체로서 안전하고 유익한 수련활동을 위한 교육·홍보·컨설팅 등의 청소년수련활동인증제 지원, 청소년의 자기도전과 성장으로 국제적인 인재양성을 위한 국제청소년성취 포상제 운영지원, 청소년활동 안전관리(청소년수련활동 신고제)등의 활동을 하고 있다. 광주흥사단은 비록 아카데미를 통한 교육운동이 90년대 이후 쇠락하거나 형식적 조직에 머무르게 되었지만 반면 수탁기관을 통한 청소년교육운동은 크게 활성화되었다. 사실상 광주 지역사회 청소년교육운동의 중심에 광주흥사단이 자리하게 됐던 것이다.

광주흥사단의 교육·문화 운동

광주흥사단은 아카데미 조직을 통한 교육운동이 한계를 보이기 시작한 90년대에는 단우들이 직접 교육운동에 관한 연구와 교육을 실행에 옮기고자 노력했다. 그 첫 번째가 ‘도산학술연구원’의 개원이다. 1993년 창립 이후 아카데미 세대들이 사회 곳곳에 배출되어 리더로 활동하는 인재들이 많은 만큼 그에 걸맞는 조직으로 성장하여야 한다는 관점에서 설립했다. 도산의 사상을 이어받아 민족과 지역사회의 발전에 관한 제반 분야에 관하여 연구하고 우리가 나아갈 올바른 방향을 모색함으로써 지역사회의 발전에 기여하고자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도산학술연구원의 주요 활동은 학술활동을 중심으로 운영하였다. 급변하는 국제정세와 미래사회의 도래를 내다보면서 통일을 비롯한 민족문제, 지방자치와 지역개발문제, 환경문제, 국제화시대에 대비하는 비전 개발, 과학기술과 정보통신의 발달에 기초한 미래사회의 문제 등에 주된 관심을 가지고 활동하였다. 또 다른 측면에서는 아카데미 조직을 통한 교육운동에서 벗어나 청소년 전체에 관한 연구와 교육을 지역사회문제와 연결하여 실행하고자 비슷한 시기 ‘청소년연구원’을 광주시교육청의 깊은 관심 속에 개원했다.

청소년연구원은 우리사회의 내일을 책임질 주역인 청소년들이 높은 이상과 꿈을 갖게 하고, 청소년을 둘러싸고 있는 잘못된 교육환경을 스스로 극복하고 밝고 건강한 젊은이로 성장해 가도록 하는데 목적이 있었다. 또한 청소년문제 연구, 상담실 운영, 청소년환경 개선, 각종 청소년 프로그램 개발과 실시, 청소년지도사 육성 등등에 힘써 새로운 시대의 도전을 능동적으로 개척해 갈 의욕적이고 창조적인 후계 세대 육성을 그 목표로 하였다. 상담활동, 심리검사, 자원봉사자의 교육 및 훈련 등을 주요 사업내용으로 하면서 이에 맞는 창의성 계발, 극기 및 자도록 훈련, 자기표현 및 의사소통 훈련 등의 주요 프로그램을 운영하였다.

광주흥사단은 2000년대 접어들어 청소년연구원의 활동이 대부분 ‘자원봉사센터’로 넘어가고 답보상태에 들어가자 새로운 청소년 교육운동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대표적인 것이 ‘나잘난학교’의 개설이다. 2006년 10월 개설한 ‘나잘난학교’는 탈학교 청소년 20여 명을 대상으로 3개월 과정으로 시작하였고, 2012년 폐교했다. 광주지방법원 가정지원으로부터 위탁받은 촉법 청소년 중 탈학교 청소년을 대상으로 자아성장 프로그램, 미술, 음악, 마임, 장애인 인권교실, 수화, 성화 사랑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자존감을 형성하고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고 사회복귀를 돕고자 하였다. 또한 2010년 8월 흥사단 이념과 도산 안창호 선생의 정신을 이어받아 단우들이 직접 미래인재양성을 위하여 광주흥사단 부설 ‘리더십아카데미’를 개원하였다. 리더십아카데미는 청소년과 시민들의 창의성 신장과 리더십개발을 위한 전문 리더십운영 기관으로 초등학생부터 성인 그리고 학교나 기업까지를 대상으로 리더십교육을 시행하고 있다.

광주흥사단은 인턴십 대안학교 ‘독립 아카데미’를 2014년 3월 개교했다. 첫해에는 8명의 학생이 입학하였다. 독립아카데미는 청소년문화의집에서 운영중인 대안학교 ‘래미학교’가 중등과정 중심이어서 고교과정을 직접 광주흥사단이 운영하고자 세운 것이다. 다만 일반적 고교과정 뿐만 아니라 직접 본인이 원하는 현장에서 실습을 병행하면서 자신의 미래를 스스로 세우도록 하였다. 특히 흥사단의 목적인 건전한 인격체가 되는 것을 우선으로 하여 운영함으로써 학부모의 높은 지지를 얻었다. 제2기에는 6명이 입학하여 과정을 마쳤지만, 이후 3기 모집과정에 준비가 부족하여 이어지지 못하고 아쉽게 폐교되고 말았다.

아카데미를 통한 교육운동이 위축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또 다른 방안으로 학생들을 직접 교육하거나 시민교육에 직접참여하는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흥사단 창립 100주년을 앞두고 새로운 인재양성을 위하여 ‘흥사단 미래사회리더 스쿨’의 창립이 제안되었다. 흥사단 본부에서 재정적 지원을 하고, 서울, 광주, 대구지부 주관 하에 2009년 제1기 대학생을 모집하였다. 광주에서는 한 학기동안 매주 교육을 하였고 43명중 36명이 수료하였다. 2010년 제2기 학생들을 모집하여 강원도에 소설가 이외수를 찾아 함께했고, 김해 봉하마을을 찾는 등 활발한 교육을 하였다. 하지만 2011년 본부의 지원이 끊기면서 중단되었지만, 광주지부는 두 해에 걸쳐 수료한 학생들을 ‘미래사회리더아카데미’를 출범시켜 지속적으로 교육했다.

다른 한편, 2009년 광주흥사단의 예비사회적기업인 사회적멘토사업단에서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유료 프로그램으로 ‘세상을 움직이는 작은 리더가 되자’는 부제 아래 ‘기러기어린이아카데미’를 시작하였다. 사회적멘토사업단은 노동부 후원으로 인력이 지원되는 사업으로 2008년 말에 선정됐다. 이 프로그램은 어린이들의 꿈과 진로탐색, 리더십과 대인관계 능력, 문화 감수성과 생태적 가치 등 고급화 된 경험과 체험 프로그램을 통해 자신의 꿈을 발견하고, 성취하도록 하며, 민주사회 지도자의 인격을 갖춘 참인물로 성장하도록 지원하는 회원제 프로그램으로 매주 토요일에 총 3기로 진행됐다.

직접 교육을 하거나 혹은 지원 사업에 의존하여 진행했던 교육운동은 효과는 있었지만 장기적으로 지속하지 못한 아쉬움이 컸다. 이런 연유로 2017년에 들어서 다시 아카데미운동에서 흥사단 본연의 교육운동을 찾고자 하는 한편 직접 교육하는 것이 아닌 시민단체 즉 NGO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함으로써 광주흥사단의 위치를 새롭게 하고자 했다. 곧 광주흥사단은 제도교육에 대한 감시와 제언 그리고 민주시민교육을 위하여 종합적으로 교육운동을 담당할 기관으로 2017년 ‘광주흥사단교육운동본부’를 발족하여 현재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특히 광주흥사단은 민주시민교육에 관한 관심과 필요성이 날로 높아가고 있는 현실에서 광주지역의 민주시민교육을 담당하는 선도적 시민단체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문화를 통한 교육운동으로서 광주흥사단이 심혈을 기울였던 것은 문화트레킹과 산악회 그리고 기러기합창단의 운영이다. 문화트레킹은 역사문화답사를 통해 지역사회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역사에 대해서도 폭넓은 안목을 제공하고자 시도됐다. 특히 단우·회원 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에게도 개방하여 함께 함으로써 시민교육 차원에서도 매우 의미 있는 것이었다. 2010년 10월부터 3년여에 걸쳐 17회를 진행했다. 다만 차량 등의 한계로 한정된 인원 그리고 매번 참여한 사람 이외에 더 확대되지 못하였지만 대단히 의미있었던 교육운동 가운데 하나로 기억되고 있다.

2000년대에 들어 광주흥사단에서 시민교육 차원에서 크게 힘썼던 것 가운데 하나가 산악회의 운영이다. 흥사단은 창립 당시부터 체력과 호연지기를 기르기 위해 산과 바다로 나가 정신과 육체의 수련을 하였다. 이른바 ‘물에 산에 YKA’이다. 이러한 전통을 이어 그동안 소수 인원 혹은 개별적으로 하던 취미생활을 동맹수련과 시민교육차원으로 발전시키기 위하여 2004년 7월 광주흥사단산악회를 발족했다. 일반시민이 대부분인 산악회는 회칙에 ‘본회는 흥사단의 한 구성원으로서 민족과 사회에 기여하는 활동에 기꺼이 동참함을 우선으로 한다’고 규정했다. 이로써 모든 회원이 흥사단의 일원임을 확인하고 민족과 사회에 봉사하는 것을 전제하여 단순한 산악회가 아니라 흥사단의 시민교육 일환으로 운영하고 있음을 분명히 하였다. 때문에 발족 이후 현재까지 광주지역에서 가장 건전하고 육체뿐만 아니라 정신적 수양도 함께 할 수 있는 산악회로서 자리매김했다.

한편, 2017년 3월 광주흥사단 산하에 ‘광주흥사단기러기합창단’을 창단했다. 기러기합창단은 흥사단 이념을 문화교육운동으로 승화시키고자 하고 있다. 특히 민족운동으로서 평화와 통일, 그리고 민주와 인권 등을 합창이라는 문화운동으로 구현하고자 한다. 합창단은 모든 사람이 하나의 화음을 구현해 내어야 하는 것으로 흥사단이 추구하는 동맹수련의 전형이라고도 할 수 있다. 기러기합창단은 2017년 5·18 행사로 전남대학교와 구도청 민주광장에서 공연하고, 10월에는 서울시청에서 주관한 전국 시민합창단축제에 참여했고, 11월에는 ‘통일을 노래하다’라는 주제로 정기공연을 가졌다. 올해는 전남대학교 5·18기념식, 일본 우타고에합창단과의 교류, 민주광장에서 6·10항쟁기념 공연, 6월 30일에는 한반도의 평화를 염원하면서 ‘평화를 노래하다’라는 주제로 임진각에서 공연했다. 그 외 요양원 등을 찾아 봉사활동도 하는 등 문화·봉사활동을 활발히 하면서 광주 지역사회를 좀 더 밝고 행복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송한용
송한용 광주흥사단 상임대표 전남대학교 사학과 교수
전남대학교 인문대학 사학과 및 동 대학원 사학과 석·박사 졸업
- 일본 와세다대학 객원연구원
- 미국 미주리대학 객원교수
- 현 전남대학교 인문대학 사학과 교수
- 현 전남대학교 5·18연구소 소장
- 현 광주흥사단 상임대표
- 저서 「동북군벌과 일본」 외 다수
- 논문 「정율성의 사상형성과 지향」, 「위구르족의 정체성과 중국 국민통합의 괴리」, 「일본의 식민지 대학교육정책 비교연구」 외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