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4년 광주에 기독교가 들어오고, 1911년 숭일학생 YMCA가 조직된 후 기독교 운동의 필요에 의해 1920년 광주YMCA(이하 광주Y)가 창립되었다. 광주Y는 창립 때부터 덕육부(德育部), 지육부(知育部), 체육부(體育部)를 두어 교육과 문화운동을 중요한 과제로 삼았다.
광주Y는 1921년에 북문밖교회에 유치원을 설치하여 어린이 보육 활동을 시작한 이후로 서북(瑞北)여자 야학, 노동 야학, 농민 강습소를 설립하여 시민들에게 교양과 생활 개선 교육을 실시하였다. 해방 직후에 농업실습학교 경영, 교육 영화회 및 계몽운동, 풍기 숙청 운동 등에 매진하였고, 1950년대는 국학, 현대사상, 철학, 독서회 등을 통해 청년학생들을 계몽하였다. 1978년에는 어린이 스포츠단을 설립하여 어린이들에게 균형 있는 지덕체 교육을 하기도 했다. 한편, 1978년 교육지표사건으로 YMCA 지도자들이 옥고를 치렀고, 1980년대에 광주Y 중등교육자 협의회, 교사회를 통해 교육민주화선언을 하기에 이른다. YMCA 백제실은 그 산실이었다. 2000년대에는 요코하마, 상하이, 마닐라 YMCA와 결연하여 지역협력과 지구촌 평화를 위해 활동하기 시작했고, 청소년들이 미얀마, 캄보디아 등에 가서 지역과 국제 봉사 체험 활동을 확대하고 있다.
1920년 광주Y가 창립총회를 한 오웬기념각은 광주 최초의 문화센터이자, 시민 플랫폼이었다. 또 숭일학교 학생 Y연극반은 순회공연을 통해 문화를 전파하고 계몽의 수단으로 삼았다. 1930-40년대에는 동서고금 음악, 무용, 가극대회, 중창단 공연 등을 열기도 했고, 삼애학원을 만들어 농촌운동을 계속했다. 축구, 야구, 배구, 탁구, 유도, 권투를 보급하여 체력을 단련하고 또 이것이 국권 회복의 토양이 되도록 하였다. 1970년엔 싱얼롱, Y극회, 포크댄스, 레크리에이션, 문학반, 가면극회를 만들어 시민들의 사회문화적 역량 함양에 힘썼다. 또 “10대의 광장”과, “시민논단”으로 청소년과 시민의 사회적 담론의 장을 마련하였다. 이는 현재도 운영중이다. 또 “시민대학”을 개설하여 광천동 지역개발, 노동자 권익향상, 리어카보내기 운동 등 사회개발운동으로 발전시켰다. 그리고 요코하마 YMCA와 유소년 축구단의 교류를 통해 친선과 국제관계개선에 기여하였다. 1980년대에 양담배 불매, 외채문제 해결, 언론민주화, 공정선거실천운동 등을 펼쳐 시민문화를 건강하게 조성하였다. 1992년 “십대의 전화” 개설과 광주 청소년종합상담실을 맡아 청소년 문화의 기반을 닦는데 힘썼다. 2000년대엔 좋은 동네 만들기로 새로운 시민 문화 운동의 활성화를 도모하였으며, 통일, 탈핵운동을 위해 ‘피스메이커 500인 위원회’를 만들어 지구촌의 평화를 위해 일하기로 다짐하고 있다.
① 광주Y는 광주평생교육의 선구적 역할을 최일선에서 담당해 왔다.
② 광주Y는 교육 소외자(유치원, 여성, 노동자, 농민 등)들에게 기독교적 사명감을 가지고 교육활동을 펼쳐 왔다.
③ 광주Y는 문화적 감수성을 일깨우고 참여를 유인하는 문화 플랫폼 역할을 해왔다.
④ 광주Y는 광주 체육활동의 산실이요 요람이었다.
⑤ 광주Y는 시민의 주체성 확립과 시민의식 함양에 꾸준히 노력해 왔다.
⑥ 광주Y는 문화적 영역의 확장과 공동체 의식을 발현하는 촉진제 역할을 해왔다.
⑦ 광주Y는 영․지․체의 균형 잡힌 평생교육을 다양하게, 다층적으로 기획하고 실행해 왔다.
광주Y는 창립 100주년을 바라보며, 비전 2020을 선포한 바 있다.
특히 “청소년에게 꿈을, 지역 사회에 밝음을, 지구촌에 평화를“이라는 표어처럼 생명과 평화의 가치를 구현하기 위해 현장을 누비고자 한다.
- 이계양 문학박사 ․ 前 광주YMCA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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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졸(문학사)
- 조선대학교 대학원 졸(문학석사, 문학박사)
- 대성여고 교사, 조선대학교, 광주교대 외래교수 역임
- 前 광주 YMCA 이사장, 이사
- 아름다운가게 광주 목포 공동대표
- 무진일움학교 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