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을 일상화하고 삶의 가치를 창조해 나가는 평생교육. 평생교육법에 명시된 평생교육의 6대 영역을 고려하여, 2007년 「한국 평생교육 프로그램 6진 분류표」를 기준으로 6개의 대분류(기초문해, 학력보완, 직업능력, 문화예술, 인문교양, 시민참여 교육)와 18개의 소분류로 구분하여 모든 평생교육 프로그램을 유형화시켰다. 이번 코너는 평생교육 6진 분류에 따라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각 분야별 전문가를 만나 그들의 배움을 통한 나눔, 그리고 삶에 대한 열정을 들어본다.
첫 번째 이야기의 주인공은 문화예술교육 분야 전문가 ‘정윤태 조각가’이다.
첫 번째 이야기의 주인공은 문화예술교육 분야 전문가 ‘정윤태 조각가’이다.
정윤태 조각가를 만나기 위해 광주 동구 금남로 3가에 위치한 세계조각장식박물관을 찾았다. 정윤태 조각가는 교육자로서, 예술행정가로서, 조각가로서 지역사회발전에 공헌하고 있는 대표 예술인이며, 지난해 초 개관한 세계조각장식박물관의 명예관장직을 맡고 있다.
박물관을 먼저 둘러봤다. 세계 각국의 화폐와 주석, 청동제품, 인형, 가면, 불탑을 비롯해 맘모스 뼈를 이용한 조각품과 옥공예품까지 희귀한 장식품들이 빼곡히 전시되어 있었다. 사업가이자 문화예술품 수집가인 김상덕 관장이 설립한 이곳에는 특히 쇼나조각(아프리카 짐바브웨 조각공동체 텡게넨게에서 만든 현대조각)만 400여 점으로, 국내에서 가장 많은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조선대학교 미술관 관장 등을 지냈던 그는 이 곳 외에도 다양한 갤러리에서 작품 전시에 관여하고 있다.
천지인(天地人)의 조화…평화, 사랑, 희망의 메시지를 담은 작품세계
조각가의 길을 걷기 시작하고 44년이 흘렀다. 사실 한 분야에서 이처럼 오랜 세월 자신의 길을 걸어온 사람들은 어느 분야를 막론하고 누구나 존경의 박수를 보내고 싶다. 예술 분야에서, 그중에서도 ‘조각’은 작품에 쏟는 정신적 노동뿐만 아니라 육체노동도 상당하기에 특유의 ‘장인 정신’이 없이는 그 오랜 세월 한 길을 걷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정윤태 조각가의 작품을 보면 그가 추구하는 삶의 태도가 고스란히 묻어 나온다. 조각품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바로 ‘사람’. 인간애가 남다른 것 같다.
“제가 본질적으로 추구하고자 하는 예술 세계는 우주 공간 속에서의 ‘하늘, 땅, 인간의 조화’입니다. 그래서 제 작품에는 ‘평화, 사랑, 희망’으로 압축되는 인간의 근원적인 소망과 염원을 담고자 했어요. 세상에 홀로 존재하는 것은 하나도 없고, 모든 존재는 한데 엉켜 서로 도와가며 살아갑니다. 서로 어울림으로써 서로 기대어 조화롭게 살고 있죠. 저는 이것이 모든 생명과 예술의 근본 바탕이라고 생각합니다.”
지칠 줄 모르는 배움에 대한 열정
어린 시절 친형을 따라 전남 완도에서 광주로 유학을 왔고, 서양화를 전공했던 형의 영향으로 미술을 시작하게 됐다. 미대에 진학했지만, 경제 상황이 어려워 학업을 잠시 중단하고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그러나 배움에 대한 욕구는 쉽게 접을 수 없었다.
몇 년 뒤 복학하여 스무 살 대학생들과 함께 다시 공부를 시작한 것이 그의 나의 29살이었다. 대학시절 전체 수석을 했고 다양한 작품 공모전에서 수상하여 실력을 인정받았다.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라서 어떻게 해서든 장학금을 받아야만 했어요. 전체 수석이나 차석이 아니면 장학금을 주는 시절이 아니었기 때문에 학교에 가장 일찍 등교하여 수업 시간에는 맨 앞줄에 앉아서 공부했고, 늦은 밤까지 조각 작업에 몰두했죠.”
몇 년 뒤 복학하여 스무 살 대학생들과 함께 다시 공부를 시작한 것이 그의 나의 29살이었다. 대학시절 전체 수석을 했고 다양한 작품 공모전에서 수상하여 실력을 인정받았다.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라서 어떻게 해서든 장학금을 받아야만 했어요. 전체 수석이나 차석이 아니면 장학금을 주는 시절이 아니었기 때문에 학교에 가장 일찍 등교하여 수업 시간에는 맨 앞줄에 앉아서 공부했고, 늦은 밤까지 조각 작업에 몰두했죠.”
처음 교육자로서 학생들을 가르친 곳은 고등학교였다. 1976년 대학을 졸업하고, 교사로 취직하여 3년 반 동안 근무했다. “당시 학생 수가 늘어나 교실이 부족하여 미술실이 없어졌어요. 그래서 화장실을 개조하여 학생들을 가르쳤죠. 전국 실기대회에서 학생들이 수상하기도 해서 가르치는 보람이 컸습니다.”
그리고 대학원 졸업 후 조선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의 지칠 줄 모르는 열정은 교육철학에도 그대로 반영됐다.
“수업은 강의실에서만 하지 않았어요. 특히 조각은 집중력이 중요한데, 집중력은 작업실에서만 키워지지 않죠. 학생들과 야외 교정을 걸으면서 장미의 생김새는 어떠한지 직접 관찰하여 표현할 수 있도록 했어요.”
그리고 대학원 졸업 후 조선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의 지칠 줄 모르는 열정은 교육철학에도 그대로 반영됐다.
“수업은 강의실에서만 하지 않았어요. 특히 조각은 집중력이 중요한데, 집중력은 작업실에서만 키워지지 않죠. 학생들과 야외 교정을 걸으면서 장미의 생김새는 어떠한지 직접 관찰하여 표현할 수 있도록 했어요.”
그의 부지런한 생활 습관은 4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하다.
매일 아침 6시부터 조각 작업을 시작하여 점심시간을 제외하고는 꼬박 12시간을 작업에 몰두한다고 한다. 그는 작품 활동을 위해 잠시도 시간을 허투루 쓰는 법이 없다.
“작품에 대한 영감을 얻기 위해 특별한 노력을 하지는 않지만, 평소 길을 걷다가도 만나는 사람, 사물들의 모습을 끊임없이 관찰하면서 배웁니다.”
정윤태 조각가는 빛고을노인건강타운, 장애인복지재단에서 봉사 경험을 바탕으로 세계조각장식박물관을 비롯한 다양한 공간에서 기획전을 여는 등 열심히 하는 작가들과 끊임없이 소통의 기회를 가질 계획이다.
매일 아침 6시부터 조각 작업을 시작하여 점심시간을 제외하고는 꼬박 12시간을 작업에 몰두한다고 한다. 그는 작품 활동을 위해 잠시도 시간을 허투루 쓰는 법이 없다.
“작품에 대한 영감을 얻기 위해 특별한 노력을 하지는 않지만, 평소 길을 걷다가도 만나는 사람, 사물들의 모습을 끊임없이 관찰하면서 배웁니다.”
정윤태 조각가는 빛고을노인건강타운, 장애인복지재단에서 봉사 경험을 바탕으로 세계조각장식박물관을 비롯한 다양한 공간에서 기획전을 여는 등 열심히 하는 작가들과 끊임없이 소통의 기회를 가질 계획이다.
브론즈 작품 23점 기증 · · · 정윤태 조각공원 탄생
아무리 저명한 예술가라 할지라도 살아생전에 자신의 이름을 건 공원이 조성된다는 것은 어마어마하게 감격스러운 일일 것이다. 남부대학교(광주광역시 광산구 월계동 소재) 교문을 막 통과하면 약 13,000㎡ 규모의 우암동산이 있는데, 우암학원을 설립한 조용기 교육학 박사를 기리는 장소이다.
정윤태 조각가는 우리나라 교육계의 원로이자 아흔이 넘은 지금도 대학에서 교양과목으로 인간학을 가르치는 조용기 학원장과의 특별한 인연으로 그의 예술혼이 담긴 조각품 23점을 기증했다. 한국미협전 최고 수상작인 「풍요」를 비롯한 문공부 장관상 수상작인 「남풍 82」 등 그의 조각 인생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남부대학교는 오는 2019년 세계수영선수권대회가 열릴 예정인 곳으로 대회의 성공 개최를 기념하기 위한 조각품을 또 준비 중에 있다고 한다.
정윤태 조각가는 우리나라 교육계의 원로이자 아흔이 넘은 지금도 대학에서 교양과목으로 인간학을 가르치는 조용기 학원장과의 특별한 인연으로 그의 예술혼이 담긴 조각품 23점을 기증했다. 한국미협전 최고 수상작인 「풍요」를 비롯한 문공부 장관상 수상작인 「남풍 82」 등 그의 조각 인생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남부대학교는 오는 2019년 세계수영선수권대회가 열릴 예정인 곳으로 대회의 성공 개최를 기념하기 위한 조각품을 또 준비 중에 있다고 한다.
그가 기증한 조각상의 가치를 모두 합하면 약 100억여 원에 이른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이기에 어떻게 작품들을 기증하게 되었는지 그 계기가 궁금했다. “2015년에 편도암 4기로 1년간 투병생활을 했어요. 지금은 건강을 되찾았지만 40여 년의 열정이 허무했어요. 그래서 모든 것을 비우자는 생각으로 조각공원을 모색했고, 학생을 중심으로 한 대중에게 대가 없이 공개하겠다는 결론을 내렸죠.”
결코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시련에 좌절하지 않고 그 과정에서 ‘나눔’이라는 더 큰 삶의 가치를 깨닫게 된 것이다. “평생 쉼 없는 예술가로 살아오는 동안 때로는 번뇌와 갈등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기도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시련과 고통을 이기고 새로운 예술적 성장을 위한 도전 정신으로 극복해 왔어요. 오직 ‘쉬지 않는 손! 머물지 않는 정신’으로 지금 이 순간, 삶에 최선을 다해 존재하고자 합니다.”
결코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시련에 좌절하지 않고 그 과정에서 ‘나눔’이라는 더 큰 삶의 가치를 깨닫게 된 것이다. “평생 쉼 없는 예술가로 살아오는 동안 때로는 번뇌와 갈등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기도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시련과 고통을 이기고 새로운 예술적 성장을 위한 도전 정신으로 극복해 왔어요. 오직 ‘쉬지 않는 손! 머물지 않는 정신’으로 지금 이 순간, 삶에 최선을 다해 존재하고자 합니다.”
- 정 윤 태
- 1946년 전남 완도 출생. 조선대학교 미술대학 및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조선대학교 미술대학교 교수 및 미술대학장, 광주비엔날레 조직위원 및 이사, 한국미술협회광주지회장, 한국예총광주부회장, 아시아문화중심도시 조성위원 등을 역임했으며, 무등미술대전, 오지호미술상, 한국조각대상전 등 각종 대회의 운영위원 및 심사위원을 맡았다.
대통령문화훈장, 국립현대미술관장상, 문공부 장관상 등 다수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