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칼럼 창조도시 광주를 꿈꾸자 노성태 l 광주국제고등학교 수석 교사 ‧ 향토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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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 고도, 광주
  호남지방의 중앙부에 위치한 광주는 전남 동부의 산지와 서부의 평야지대를 잇는 요충지로 일찍부터 두 지역 간 생산 교역의 중심지, 행정ㆍ문화ㆍ예술의 중심지로 발달하였다. 옛 부터 문화와 예술을 숭상하여 예향(藝鄕), 세파와 타협하지 않으면서 외침과 불의에 맞서 분연히 일어나 민족과 정의를 위해 싸웠기에 의향(義鄕)이라는 애칭이 따라다녔으며, 다양한 음식문화를 발달시켜 맛의 고장(味鄕)으로도 이름이 높은 곳이다.

  광주가 남도의 중심 치소가 된 것은 신라 경덕왕 16년(757), 무진주를 무주로 고치고 15군 43현을 관할하면서부터다. 따라서 광주가 남도의 중심이 된 것은 엄밀히 말하면 천년도 훨씬 뛰어넘는다. 그러나 중심 치소가 되기 훨씬 이전부터도 광주는 하이테크 기술을 갖춘 사람들의 삶의 보금자리였다.

  최초의 광주인이라 할 수 있는 12만 5천 년 전의 구석인들이 오늘 상무지구로 불리는 영산강변의 치평동 등지에 살았으며, 청동기시대에는 용두동 송학산 기슭에 탁자식 고인돌을 남기기도 했다.

  지금으로부터 2천여 년 전인 철기시대 칠기 제품을 생산한 신창동 사람들의 기술력은 당대 최고였다. 그들이 남긴 155센티미터 두께의 벼 껍질 압착층은 현재까지 확인된 세계 최대의 벼 생산 자료이며, 신을 만들 때 사용하던 틀인 신발골도 세계 최초다. 그리고 그들이 만든 비단과 현악기, 발화도구, 수레바퀴는 한국 최고다.

  후백제의 견훤은 광주를 근거지로 출발하였으며, 45년 뒤 신검이 왕건에게 망할 때는 마지막 저항지였다. 기록에 보이는 광주의 첫 명칭은 『삼국사기』동성왕 20년에 나오는 무진주(武珍州)다. 그리고 고려 태종 23년(940)에 ‘광주(光州)’라는 명칭이 처음 등장한다.
  고려 때의 유적으로는 광주공원에 남아 있는 성거사지 5층 석탑과 운천사 마애여래좌상, 신룡동 5층 석탑 등이 있다. 고종 43년(1256)에는 몽고의 차라대가 이끈 군대가 무등산을 점거하기도 했고, 고려 우왕 4년(1388)에는 왜구가 광주를 함락되기까지 하였다. 광주를 비롯한 전라도 일대에서 왜구를 토벌하는데 큰 공을 세운 사람이 망월동에 위치한 경렬사의 주인공 정지(鄭地, 1347∼1391)이다. 정지의 남해대첩은 최영의 홍산대첩, 이성계의 황산대첩과 더불어 왜구 격파 3대첩으로 불린다.

  천년이 훨씬 넘는 세월동안 무등산 자락과 광주천을 배경으로 살아 온 광주인들이 남긴 삶의 흔적은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일본과의 교류를 보여주는 명화동ㆍ월계동 장고분도, 신라시대 축조된 무진고성도, 증심사ㆍ원효사 등 불교 흔적도, 광주에서 거병하여 후백제를 건국한 견훤의 흔적도, 전국 최초인 향약시행인 고싸움 마을의 부용정도, 최고급 분청사기를 구워내던 가마터도 그 흔적들이다.

  그러나 세월과 인간은 무서운 파괴자였다. 남아 있는 흔적보다 훨씬 더 많은 흔적들이 사라져버렸다. 대부분은 세월의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사라졌지만, 더러는 광주읍성처럼 일제의 침략에 의해 허물어지기도 했다. 그리고 더러는 개발에 눈이 뒤집힌 인간의 탐욕과 욕심이 마지막 남은 광주의 옛 모습마저 깡그리 없애버리고 만다. 태봉산이 헐리고 경양방죽이 메워지고 유림수가 베어진건 다 그 때문이었다. 미래를 보지 못한 단견이 가져다주는 파괴는 아픔이다. 그러나 아픔도, 추억도, 흔적도 다 우리들이 가슴에 품어야 할 역사요, 문화이다.
시대정신을 실천한 무등산의 영웅들
  천년의 역사는 수많은 영웅들을 낳았다. 후백제를 건국한 견훤, 수군을 창설하여 왜를 격퇴한 정지, ‘신비복위소’를 올린 박상, 무진군으로 강등된 광주를 광주 목으로 승격시킨 이선제,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일으켰던 고경명과 김덕령, 정묘호란 당시 안주성을 지켜낸 전상의, 이황과 사단칠정 논쟁을 벌인 기대승, 이괄의 난을 진압하고 1등공신이 된 정충신, 한말 부자의병장이 된 양진여와 양상기, 광주학생항일운동을 주도한 장재성과 장매성, 중국 인민군 군가를 작곡한 정율성, 해방 이후 최초로 시민장으로 장례를 치른 최흥종, 청년 운동의 대부 박준, 5ㆍ18민주화운동의 주역인 박관현과 윤상원, 6월 항쟁의 불씨를 지핀 이한열 등, 무등산이 낳은 영웅은 그 숫자를 셀 수 없이 많다. 양림산에 묻힌 배유지ㆍ오웬ㆍ엘리자베스 쉐핑 등 광주에 사랑을 남긴 외국인 선교사들도, 뱃사공으로 한푼 두푼 모은 돈으로 서창 면민들을 구제한 뱃사공 박호련도 무등산이 낳은 영웅들이었다. 무등산이 낳은 영웅은 이들 뿐만이 아니었다.

  임진왜란과 대한제국 말기 나라를 구하기 위해 목숨 걸고 싸운 광주 의병도, 광주학생독립운동과 4ㆍ19 혁명, 5ㆍ18민주화운동, 6월 민주 항쟁 당시 선두에 선 학생과 시민들도, 민주주의를 지켜내기 위해 금남로에 촛불을 켠 시민들도 다 무등산이 품은 광주의 영웅들이다.

  광주는 이들 영웅들에 의해 ‘민주’라는 시대정신의 실천지가 된다.
창조도시, 광주를 꿈꾸자
  무등산이 품은 광주의 영웅들이 피와 죽음으로 지켜 낸 가치가 의로움이며, 그 의로움의 가치가 역사적으로 축적되고 발현된 것이 광주인들의 자긍심이자 정체성이 된 ‘민주’다. 이제 광주 정신인 민주는 새로운 가치인 인권ㆍ평화의 정신으로 확산되어야 한다. 이는 국립 5ㆍ18 민주묘지에 형상화된 기념탑이 내포한 의미이기도 하다.

  그런데 오늘 광주 정신은, 광주는 어딘지 허전한다. 광주를 벗어나지 못한 답답함도 있다. 어딘지 갇힌 느낌도 받는다. 광주 정신이 대한민국 국민과 세계와 소통해야 하며, ‘빛’으로 상징되는 창조 도시로 다시 부활해야 하는 이유다.
  고려 말 인물인 이색(李穡. 1328∼1396)은 홍수를 다스리기 위해 광주천에 건립된 정자 석서정(石犀亭)의 ‘석서정기’에서 광주를 ‘광지주(光之州)’, 즉 빛의 고을로 해석했다.
광주는 빛고을이다. ‘빛’이 갖는 창조성은 이미 2,000년 전 신창동 유적지 출토 칠 제품의 유물에서 이미 확인된 바 있다. 강진 청자를 계승한 15세기 무등산 자락의 분청사기도, 16세기 무등산 자락에서 꽃피운 가사문학도, 19세기 전라도 땅에서 만개한 판소리도 다 ‘창조성’이 그 밑바탕이 되었다.

  자긍심과 정체성이 된 민주ㆍ인권ㆍ평화의 광주 정신 위에 창조도시 광주가 이젠 미래의 꿈이었으면 싶다.
노 성 태
1958년 전남 나주에서 태어났다. 전남대학교 사범대학 국사교육과와 동 대학 사학과 대학원을 졸업하고, 국제고등학교에서 수석교사(역사)로 재직하고 있다. 광주교육연수원 등에서 강사로 활동하면서 남도의 역사와 문화를 답사하고 정리하는 일을 하고 있다. 저서로『양진여ㆍ양상기 부자의병장 실기』(2009), 『독립의 기억의 걷다』(2010), 『남도의 기억을 걷다』(2012),『신한국통사』(2013), 『광주의 기억을 걷다』(2014), 『영산강 고대문화 마한』(2015), 『역사를 배우며 문화에 노닐다』(2015),『광주, 전남 China Road』(2017)등 다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