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칼럼 이모작이 필요한 시대‘나만의 명함’을 준비하자 한혜경 호남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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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함 없이 당신을 소개할 수 있나요?

  지난 10여 년에 걸친 은퇴자 연구를 통해 수많은 은퇴자를 만나는 과정에서 나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얼마나 ‘명함’에 집착하는지를 알게 되었다. 참 안타까운 일이다. 은퇴와 함께 버려야 할 것이 경력, 학력, 사회적 명성이라지만, 명함이야말로 은퇴와 함께 곧바로 버려야 할 물건이다. 그야말로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물건이 아닌가.
  그럼에도 내가 만난 은퇴자 중에는 퇴직한 후에 가장 아쉬운 것이 ‘명함’이라고 대답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았다. 이들은 말한다.
  “딸 결혼할 때 내밀 명함만 있다면...”

  작년에 만났던 S씨(54세)도 그중 한 명이었다. 은퇴 후에 제일 당황스러운 게 명함 없이 자신을 소개하는 일이라고 했다. 전에는 명함 하나면 자신을 설명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것이다.
  “내가 다니던 회사 이름이 곧 나였고, 00부장이라는 직위가 나의 별명이었죠.”
  그런데 명함이 없으니까 너무나 허전하다는 것이다. 아니 허전한 정도가 아니라 자신의 가치가 떨어지는 느낌이라고 했다. 사람들을 만날 때 자신을 어떻게 소개해야 할지 모르겠고, 왠지 초라해 보여서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前 000'라고 잔뜩 적힌 그런 명함을 가지고 다니고 싶지도 않다고 했다.
  S씨는 덧붙였다.
  “사실 명함도 명함이지만, ‘무직’ 상태라는 게 더 문제죠. 하루빨리 직장을 잡아서 내 명함을 만들어야 할 텐데... 그런데, 일자리 찾는 일이 쉽지 않네요.”
당신도 ‘조직맨’ 인가?

  문제는 명함 때문에 고민하는 은퇴자들, 그래서 하루 빨리 일자리를 찾아야 한다고 말하는 은퇴자들 대부분이 ‘조직맨’(사실은 ‘조직퍼슨’이라고 해야 옳으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직은 남자들이 더 많다)이라는 점이다. 특히 괜찮은 대학 나오고 거의 전 생애를 한 직장에서만 보냈던 사람들일수록 조직맨일 가능성은 더 높았다.
  S씨도 말했다.
  “사실 ‘평생직장은 없다’는 말은 수없이 들었지만, 그래도 회사에 충성하면 회사도 나한테 신의로 보답할 거라고 믿었죠. 조직과의 관계가 뭐 영원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가겠지, 설마, 라고 생각했죠.”

  그러나, 이렇게 오래 조직맨으로 살아온 사람들 중에는 혼자서 독창적으로 일하는 법을 잊어버린 사람이 많다. 즉 조직이 시키는 일은 잘하지만, 자기 혼자서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아니 무슨 일을 해야 할지조차 잊어버린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다. 이들은 무슨 일이든 시키면 잘할 수 있다고 말하지만, 자신이 뭘 잘할 수 있는지 모르는 경우도 있다. 할아버지, 아버지, 아들 3대가 함께 구직해야 하는 시대임에도 자신의 역량이나 강점을 모른다는 건 치명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자기 자신의 꿈을 좇았던 친구들이 부럽다

  S씨는 요즘에야 자꾸 주변을 둘러보게 된다고 했다. 그리고 나이 들어도 명함 걱정 하지 않아도 되는 친구들이 제일 부럽다고 했다. 그들은 자신의 꿈을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추구해온 친구들이다. S씨는 덧붙였다.
  “사실은 저도 한때 애니메이션 작가가 될까, 심각하게 고민했거든요. 그런데, 저는 그 친구들처럼 나 자신에게 투자하지 못했어요. 내 월급과 시간의 10%, 아니 5%만이라도 나 자신에게 투자했어야 했는데.....”
  S씨는 심각한 얼굴로 말을 이어갔다. 사실 자신의 꿈을 따라가지 못한 건 자기 마음 속에 있는 수치심이나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부끄럽지도 않아? 어떻게 그런 그림을 남 앞에 내놓을 수 있어?’ 라고 말하는 자기 안의 목소리를 뿌리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런 말을 듣느니 차라리 회사에 취직해서 평범하게 살아야지, 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리고 정신없이 직장생활 하는 동안 자신이 애니메이션 작가가 되고 싶다는 꿈을 가졌었다는 사실 자체를 잊어버렸다고 했다. 은퇴하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이 뭘 놓쳤는지를 깨달았다는 것. S씨는 말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남들의 비판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힘이 부족했어요. ‘그래, 이게 나야’ 라며 당당하게, 아니 바보처럼 단순무식하게 밀고 나갔어야 했는데....”

‘나만의 명함’을 준비하자. 그것도 여러 개

  미래학자들은 지금 대학에 다니는 학생들은 평생 직업을 적어도 대여섯 차례 바꾸며 살게 될 것으로 예측한다. 중요한 건 이게 대학생들만의 얘기가 아니라는 점이다. 일생 단 하나의 직업만을 가지고 살아가던 시대는 이제 끝났다. 100세 시대란 이모작, 삼모작이 필요한 시대이다. 여러 가지 일을 섭렵하며 사는 걸 재미와 보람으로 여겨야 하는 시대이다.
  그러므로 ‘이제 꿈은 사라졌다’라고 말하지 말라. 꿈에는 나이가 없다. 여러 가지 가능성을 열어놓고, 여러 분야의 재능과 열정을 아우르며 살 수 있도록 노력하라고 말하고 싶다.
  명함도 마찬가지. 평생, 하나의 명함, 회사 이름이 크게 박힌 명함만 좇던 시대는 이미 지났다. 이모작 시대를 살아야 할 당신은 앞으로도 여러 개의 명함을 더 만들어야 할 것이다. 이왕이면 당신만의 개성, 당신만의 강점을 보여줄 수 있는 명함을 구상해 보시라. 그것도 여러 개를.

한혜경
한혜경 호남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이화여자대학교에서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여성학 석사와 사회복지학 석ㆍ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책임연구원으로 일했으며, 40대 초반에 대학으로 자리를 옮겨 노인복지를 세부 전공으로 연구하며 다수의 논문을 발표했다. 2001년과 2010년에 ‘한국연구재단’의 연구비 지원을 통해 1000명에 달하는 은퇴자를 조사했고, 특히 베이비붐 세대 은퇴자 300여 명에 대한 심층면접을 실시했다. 저서로는 《나는 매일 은퇴를 꿈꾼다》, 《남자가 은퇴할 때 후회하는 스물다섯 가지》, 《나는 품위 있게 나이 들고 싶다》 등이 있다. 동아일보, 문화일보, 여성신문 등 매체와 ‘미래에셋 은퇴연구소’ 사이트에 칼럼을 연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