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평생교육史 광주 여성 교육의 시작과 발전기 (1900-1980) 한신애 | 광주북구건강가정·다문화가족지원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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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화 시기 여성 교육의 태동

1900년대 초기 우리 여성들은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남존여비 사상에 의해 심각한 차별을 받아왔었다. 그러나 개화 바람이 불면서 여성의 권리와 여성의 교육에 있어서 크고 작은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독립신문>은 여권론을 강하게 주장하였다. 여성을 억압하는 봉건적인 혼인제도의 개혁, 애정과 평등한 인격에 기반한 부부 중심의 근대적 가족제도, 여성의 교육권과 사회적 활동의 필요성, 여성의 자주적 각성과 평등한 참여도 요구하였다. 동학사상은 인간의 평등과 여성해방 사상을 불어넣어 당시 여성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기독교는 하나님 앞에서 만인이 평등하다’라는 사상을 펼쳤는데 이것은 남녀칠세부동석, 절열관, 삼종지도, 남존여비 등의 여성 억압적 유교 윤리관에 억눌렸던 여성들의 인식변화에 영향을 주었다.
조선시대까지 배움의 기회조차 단절되었던 당시의 여성들이 공식교육제도를 통해 배울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의미 있는 것이었다. 1919년 관․공립, 사립 보통학교에서 조선인 여성 취학률은 0.7%에 불과하였는데 당시 남아의 취학률 5.3%에 비하면 현저히 낮은 수준이었다. 교육기회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에서 조선인이나 종교계가 운영하는 사립학교는 여성들의 교육기회를 열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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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과 6.25 전쟁 이후에는 각 지방에 초·중·고등학교가 개교하면서 공교육 기관이 확산되었다. 또한 광주의 경우, 송정여자상업고등학교, 광주여자상업고등학교 등이 개교하면서 여성들의 전문직업교육의 기회가 확대되었다. 1951년 9월에 전남대학교, 1955년에는 광주사범대학이 개교하여 여성들의 대학진학도 증가함에 따라 여성들의 고등교육참여 기회 또한 확대되었다.

여성사회단체 설립과 여성의 사회교육 확산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이 설립한 공립보통학교의 수용 능력이 너무나도 제한되어 있고 학비마저 비쌌다. 1920년대에 들어 실력배양운동과 학원설립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면서 가난한 청소년들을 위한 사설학원과 강습소 야학 등의 설립이 급격히 증가하였다. 소학교, 마을의 사설학교, 야학 등을 통해 당시의 여성들도 문맹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가 열리게 된 것이다.
1922년 제중병원(현재 광주기독병원)에 간호원으로 근무하고 있었던 선교사 서서평은 처음에는 자신의 집에서 성경만을 가르치다가 그 후 오웬기념각 옆 작은방으로 옮겨 과학에 대해 가르쳤다. 입학자격은 15세 이상 40세의 불우한 여성들이었다. 기금을 기부한 사람의 이름을 따서 이일학교라고 개칭하였다.
광주기독교부인전도회, 광주부인회, 광주청년회, 서북여자야학, 나주안식일교회 부인야학, 담양청년회 부인야학, 능주야학, 창평부녀야학, 암태면 여자강습소가 있었다. 교육과정은 '조선어'가 중심이었고, 산술, 한문, 일본어, 서간문, 주산과 미술 등으로 수업용어는 우리말로 하였다. 1921년에 북문 밖 교회에서 시작한 서북여자야학의 강사는 박경순, 박화성(소설가)이었고, 학생들은 보통 100여 명 안팎, 많을 때는 300명까지 모였다. 연령 제한 없이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은 모두 받아들여 40세 이상의 부인들도 섞여 있었다. 학교에 갈 수 없는 가난한 가정의 딸, 유학생 남편을 둔 새댁, 부잣집 며느리, 이혼 여성들도 있었다. 야학은 정규학교가 아닌 만큼 나이 어린 소녀들과 어머니뻘 되는 부인들이 절반씩 차지했으며 새로운 요리법, 염색법, 재봉 등을 소개, 신문명과 합리적 생활을 교육하였다. 야학은 1925년 이후 재정난과 일제의 야학탄압조치가 강화되어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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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YWCA가 1922년에 창립된다. YWCA는 야학반, 농촌부녀자 야학과 계몽활동, 체육지도자 양성을 시도하였다. 1950년대까지의 광주 YWCA의 주요활동은 평생교육 차원에서 각종 교양강좌를 개설하는 것이었다. 당시 월례강좌 주제를 보면 ‘남녀교제’, ‘올바른 신앙생활’, ‘보건’ 등이 있었다. 강좌마다 교실은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다. 또 염색 강습, 재봉강습회 등 기술교육도 있었고 우리의 민요와 가곡 등을 배우는 문화교육도 있었다. 당시에는 학교교육을 받지 못한 여성을 위한 야학, 호남여숙, 별빛학원 등도 있었으며 부녀자 직업 보도소는 자수과, 양재과, 편물과, 요리과 등의 기술교육과정을 개설하였다. 1960년대 들어서 광주 YWCA는 계명여사를 개소하여 양재, 편물, 타자, 미용, 도배, 페인트 등 여성들의 기술교육을 실시하였고, 여성의 직업을 다양하게 개발하였다. 1970년 시작된 광주 장운동 농촌사업은 상설탁아소, 부녀자 교육, 신협 교육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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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해방 이후 여성 사회교육의 내용은 주로 가정생활을 보다 합리적으로 할 수 있도록 하는 생활개선, 여성의 지위 향상 교육, 부업, 취미 생활 교육이 중심이었다. 195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여성의 정치참여와 행정참여의 필요성, 여성의 권리와 지위 향상을 위한 법률 등으로 확대되었으며 다른 한편에서는 영화나 연극, 문학, 그림 등 문화교육과 영어나 독어 등 어학교육, 철학, 심리학, 문화사, 심리학, 미술사 연구, 니체연구, 불교와의 만남 등으로까지 확장되었다.
1967년 준공된 전남부녀회관에서는 여성의 권익보호와 복지증진을 도모하고 근로여성의 경제적 자립을 위한 교육과 사업을 실시하였다. 1970년에 ‘전라남도 여성회관’으로 명칭을 바꾸면서 각종 취미 문화 등 평생교육 차원의 다양한 교육도 이루어졌다.

민주화와 사회발전의 동력으로서 여성평생교육

1970년대에는 사회변화의 주역으로서 여성들의 영향력이 더욱 커지게 된다. 따라서 어머니대학, 수요강좌, 청년 대상의 화요강좌, 저소득 근로여성교육, 시내버스 안내양 교육, 소비자의식교육 등을 실시하였다. 광주의 경우 1972~73년에는 로케트전기, 한일섬유, 전남방직, 일신방직, 광주고속, 삼양시내버스, 대창버스, 등에서 일하는 여성들에게 교양강좌, 여성건강교육, 성교육도 실시하였다.
1970년대 후반 정식 학교 교육을 받지 못한 근로청소년들을 위한 노동야학이 운영되었다. 또한 이 시기에는 주부들을 대상으로 하던 한글 교육은 점차 대상연령 폭을 더 확대해 나아갔다. 1978년 6월부터 시작한 <민중논단>은 사회정의 실현, 민주화에 대한 염원과 맞물려 여성들이 적극적으로 사회에 참여하게끔 하는 동력이 되었다.

한신애
한신애 광주북구건강가정·다문화가족지원센터장 프로필
1974~1976 광주전일방송 아나운서
1982~1983 광주YWCA 프로그램 간사
1998~1999 광주열린가족상담센터 상담원 및 사무국장
2001~2003 동신대학교종합사회복지관 재가복지팀장 및 동신어린이집원장
2004~2007 양지종합사회복지관 복지행정 팀장, 양지노인주간보호센터 센터장(겸임)
2008~현재 광주북구결혼이민자가족지원센터 센터장
광주북구건강가정지원센터장(겸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