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정보화사회가 되면서 평생교육의 중요성은 커지고 있다. 과거에는 학교에서 배운 지식으로 평생을 살아갈 수 있었지만, 지금은 학교 교육만으로는 부족하고 끊임없이 배워야 살아갈 수 있다. 인공지능 등으로 대표되는 4차 산업 시대가 되면서 더욱 심화될 것이다.
지난해 12월 광주평생교육진흥원은 ‘광주평생교육 100년사’를 주제로 심포지엄을 개최하였고, 이를 계기로 필자는 평생교육의 뿌리를 찾아보았다.
조선시대 공식교육기관은 ‘성균관’과 ‘향교’였다. 태조 이성계의 ‘1읍 1교 정책’은 5백년간 유지되었고, 현재 우리나라에만 234개 향교가 남아 있다. 조선 초기에는 향교가 교육기관으로서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였지만, 16세기 이후 서원이 발전하면서 서원의 교육적 기능이 강조되었다.
대표적인 평생교육기관인 ‘서당’은 연중 운영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 농한기를 이용하여 계절적으로 운영되었다. 큰 마을마다 서당이 있고, 주요 문중은 자녀들을 위해 서당을 개설했다. 학동들은 천자문, 사자소학 등 기초적인 한문교육을 받았다.
일제강점기에 교육기관은 설립 주체에 따라 공립과 사립으로 나뉘고, 공교육기관은 중등학교, 보통학교, 소학교, 유치원으로 나뉘며, 평생교육기관은 야학원과 학원이라고 볼 수 있다. 야학(원)은 주로 성인들을 위한 문해교육과 기초학습에 집중했다면, 학원은 공교육에 준하는 교육과정을 개설하였다.
1920년 6월 12일에 창립된 광주청년회가 광주보통학교(현 광주서석초등학교) 동창회에서 운영하던 광주여자야학을 계속 사업으로 진행하였다. 이 야학은 흥학관(興學館)에서 김필례(교장), 임자혜(교사), 홍승애 등이 운영했다. 이들은 한글, 한문, 산술, 가정학 등을 가르쳤는데 수강생은 4백여 명에 달했다.
1921년에 북문밖교회(현 광주중앙교회, 최흥종 목사)에 설립된 서북여자야학원은 여자만 다니고, 1923년에 설립된 광주노동야학원은 노동자를 위한 야학이며, 이후 설립된 용전노동야학원, 두암, 망월, 일곡, 신룡, 효령, 운암, 오치, 신가야학원은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생활권별로 설립·운영되었다. 당시 여자의 문맹률이 매우 높았는데 성경을 읽기 위해 한글교육이 절실했다.
야학과 별도로 중흥학원, 광주청년학원, 광주여자청년학원, 광주숭명학원, 별산학원이 있었다. 중흥학원은 서로득 선교사가 1919년 4월에 설치하고, 교사 2명에 학생이 21명이었고, 광주숭명학원도 서로득이 1926년 9월에 설치하고 교사 2명에 학생이 70명이었다. 배영학교는 사동의 서현교회(옛 향사리교회) 구내에, 숭명학교는 금남로 5가 옛 역전통에 있었다. 학원은 당시 보통학교에도 입학할 기회를 갖지 못한 소년들에게 공교육을 제공한 ‘간이학교’이었다.
해방 후 공교육이 폭발적으로 늘어난 시절에는 노동자를 위한 야간특별학급과 산업체 부설학교가 성장했다. 1970년대 후반에는 대학생이 중심이 되어 노동자들에게 검정고시 준비와 노동법을 가르치는 노동야학을 세웠다. 1980년 5.18광주민중항쟁의 중심에 섰던 ‘들불야학’도 그중 하나였다.
광주지역 평생교육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각종 자료를 집대성하여 보전하고 전시하며 교육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아카이브가 필요하다. 역사가 있어서 기록이 남지만, 시간이 지나면 기록이 역사를 창조한다. 광주광역시평생교육진흥원과 광주광역시평생교육협의회 등이 중심이 되어 추진하길 기대한다.
- 이 용 교
- 광주대학교 사회복지학부 교수
- 중앙대학교와 동 대학원에서 사회복지학을 전공하여 문학박사를 취득하고, 한국복지정책연구소와 한국청소년개발원 연구위원으로 일하다가 광주대학교 사회복지학부 교수가 되었다. 한국청소년복지학회 회장, 국제사회복지학회 회장, 한국지역사회학회 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는 디지털 사회복지개론, 복지상식 등 30여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