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나에게 의미 있는 단어 세 개를 꼽으라 하면 어머니, 가족, 그리고 야학을 들겠다. 야학은 어떻게 해서 나에게 이토록 중요한 의미가 되었을까.
살다 보면 깊은 수렁 속에 빠진 듯 한때가 있지 않던가. 내 인생의 40대 중반은 그런 시기였다. 야학이 내게 다가온 것도 그 무렵이었다. 그리고 야학은 신기하게도 나와 궁합이 잘 맞았다. 그래서 다른 선생님은 일주일에 한 번 나오는데 나는 매일 야학을 찾았다. 그 공로 덕분인지 몰라도 넉 달 만에 나는 교사에서 교장이 되었다. 삶이 한참 메말라 가는 판에 갑자기 생기가 돌았다. 그 흔한 명함 하나 없던 존재에서 갑자기 명함을 뿌리는 처지가 되었다. 사람들은 명함을 받고는 한결같이 나를 한 번 더 쳐다봐 주었다. 야학에 매이다 보니 술친구 소일거리 친구들은 하나둘 떠나갔지만 난 개의치 않았다.
그러는 동안 이십여 년의 세월이 흘러갔다. 적지 않은 세월인데도 난 단 한 번도 흔들리거나 지치지 않았다. 더 이상 방황하지도 않았다. 부모님이 상을 당해 부득불 빠진 것 외에는 수업을 빠진 기억이 거의 없다. 그 길이 평탄한 길이어서가 아니다. 텅 빈 교실을 기약 없이 지켜야 할 때도 있었고, 캄캄한 밤에 전신주나 정류장에 전단을 붙이는 일은 지금도 하는 일이다.
뒤돌아보면 참 별났다. 봉사라는 가치를 앞장서서 실천할 만큼 나는 시민의식이 투철한 사람이 아니다. 민주주의와 정의, 인권 같은 고상한 가치를 위해 물대포를 맞거나 최루탄 가스를 마실 용의는 있지만, 그렇다고 일부러 앞장서서 나설 생각은 없다. 그런데 도대체 어떤 기운이 나를 이토록 몰아세운 것일까. 이십여 년의 세월 동안 한결같이 내 안에서, 혹은 내 밖에서 나를 붙들어 매고 이끌어 온 그것은 무엇일까.
구한 말 조선은 혼란과 암흑의 시기였다. 인간을 상하로 등급을 매겨 차별하고 있었고, 조정은 부패하고 무능했다. 탐욕과 위선의 제국주의가 세상을 뒤흔들며 유행하는 사이, 이웃 나라 일본은 짐승이 되어갔다. 실학이라는, 어쩌면 자본주의적 사회발전 과정에서 사농공상의 맨 아래 계급이었던 상인은 이제는 떼돈을 벌어 한도 풀고 양반도 되었다. 하지만 민중들은 대부분 여전히 낮은 신분에 돈이 없다는 이유로 이리 채이고 저리 채이면서 인간 대접받기를 소원했다. 개항하고 신식교육 등 다양한 기회가 주어졌지만, 그들에게 돌아갈 몫은 아니었다. 기회는 힘 있고 돈 있는 자들의 차지였다.
(대학아 중학아 불이나 나라! 학교 못 간 우리 아들 성화가 났다!)
해가 지고 어둠이 짙어지면 별이 뜨듯이 이렇게 조선사회에 어둠이 차곡차곡 쌓여가자 하나둘씩 별이 뜨기 시작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야학이다. 구한 말 하나둘씩 등장하던 야학은 일제 삼십육 년의 칠흑 같은 어둠의 시기를 지나면서 때론 또렷하게, 때론 가물가물하게 빛을 발하면서, 교육으로 우리 민족의 길을 비추고, 길을 이끌면서 희망이 되었다. 일제가 망하면서 어둠의 절정은 지나갔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둠이 이 땅에서 완전히 물러난 것은 아니었다. 6.25 전쟁 후의 지독한 가난. 이어진 잔혹한 독재가 새로운 형태의 어둠으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야학은 노동야학, 생활야학, 장애야학, 검시야학 등 다양한 형태의 빛을 발함으로 어둠을 밀어내며, 민중들과 함께 새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지금 우리는 개발도상국 지위를 스스로 포기할 만큼 잘살게 되었고, 전 세계가 모이는 유엔에서도, 열 번째 안에 드는 부담금을 낼 정도의 부자나라가 되었다. 우리 주변에서 교육기관과 교육기회는 차고 넘친다.
이제 날이 밝고 광명의 시간이 온 것이다. 사람 사는 곳에 이런저런 어둠이 어찌 없으리오마는 적어도 지난 한 세기 우리 민족이 겪었던 그 지독한 어두움은 다시는 없기를 바랄 뿐이다.
그리고 이렇게 광명이 찾아 왔다고 해서 별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별은 여전히 우리 곁에 있으면서 행여 시대가 다시 암울해진다면 별은 또다시 빛을 발하리라는 것을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초창기 우리 ‘사랑의교실’ 교사가 쓴 ‘임을 위한 행진곡’이라는 노래에 이런 가사가 있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하늘의 그 수많은 별들에게 누가 이름을 붙이는가. 남이 알아주든 말든, 이름을 불러주든 말든, 심지어는 사랑까지도 포기했던 그 뜨거웠을 영혼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어쩌다 나는 그 별들 중 하나가 되었을까 그저 고맙고 행복할 뿐이다. 이처럼 거대하고 신비한 역사의 서사시가 나를 이끌었고 밀어붙였음을 이제야 나는 조금씩 알게 되었다.
야학인들 사이에 주고받는 말이 있다.
“야학은 야학을 없애려고 야학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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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태교장선생님
- 야학 사랑의교실 교사 (2002 ~ 2019년 현재)
-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사회복지학. 청소년교육학 전공 (2011~2016년)
- 평생교육사, 사회복지사, 청소년상담사, 직업상담사 자격 소지
야학(夜學)이란 주로 민간단체나 학생 등이 근로 청소년이나 정규교육을 받지 못한 성인 등을 대상으로 운영하는 비정규 교육기관입니다. 야학은 일제강점기에 크게 발전되었는데, 이를 바탕으로 하여 광복 이후에는 학생단체나 종교단체에서 근로 청소년·극빈 아동 등을 대상으로 야학을 시행해 오고 있습니다.
설립 초기인 일제강점기에는 사설의 경우 공식 명칭을 사설학술강습회라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사설학술강습회는 주로 밤에 실시 되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는 강습회 그 자체를 야학으로 통칭하여왔습니다.
그러다가 본격적으로 야학이 발달하게 된 것은 3·1운동이 일어나고부터입니다. 3·1운동 이후 민족 실력 양성 운동이 일어나면서 교육열이 고조되어 전국적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이와 같은 일제강점기의 야학 운동은 교육시설의 부족과 생활의 빈곤으로 말미암아 정규교육을 받기 어려운 대상자들에게 초등 교육기관으로서의 구실을 톡톡히 해주었으며 국권 회복을 위한 민중 계몽에 크게 이바지했습니다.
이때의 활발했던 야학 운동이 오늘날에도 이어져 1970, 80년대에는 노동자를 위한 노동야학과 중등과정을 마치지 못한 학생들을 위한 검정고시 야학이 활발했습니다. 소련을 포함한 동유럽이 무너지고, 대도시를 제외한 거의 모든 지역의 중학 의무교육이 시행된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는 노동야학과 검정고시 야학도 많이 없어져 지금은 서울 시내에서도 몇 개 남아 있지 않은 실정입니다.
일제강점기의 야학 교육운동은 식민지교육정책에 따라 교육시설의 부족과 민중 생활의 빈곤으로 정규학교의 취학이 어려운 시기에 초등교육기관으로서의 구실을 하여 큰 교육적 성과를 올렸을 뿐만 아니라, 국권 회복을 위한 민중 계몽에 크게 이바지하였습니다. 당시 민족이 당면한 역사적 과제를 민중이 자율적으로 해결하려는 실천적 행동이었기 때문에 그 민족사적 의의는 더욱 큰 것입니다.
야학 교육을 통해 수많은 아동이 교육의 기회를 가질 수 있게 되었고, 특히 문맹자들의 계몽에 성과를 올렸으며 여성 교육에 크게 이바지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여성의 지위 향상과 농민운동 및 노동운동의 성장에 이바지할 수 있었으며, 궁극적으로는 민족 실력양성에 공헌하게 되었습니다.
[출처]
뜻도 모르고 자주 쓰는 우리말 어원 500가지(이재운 외, 2012)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017)